조선시대는 유교적 질서를 기반으로 국가 체제가 운영되었지만, 실제 민중의 삶은 자연과의 교감, 전통신앙, 구전설화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경상도 지역은 척박한 산지와 함께 유서 깊은 마을, 사찰, 강이 어우러지며 다양한 설화가 형성된 공간이었습니다.
민담은 조선 사람들의 세계관을 반영하며,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도구였고, 설화 속 존재들은 민중의 두려움, 희망, 지혜, 믿음을 상징했습니다. 본 글에서는 경상도 지역에 전해지는 대표적인 설화를 통해 당시 조선 사람들의 자연관·사회관·신앙을 들여다보며, 그 설화가 오늘날 지역 문화자산으로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화왕산 처녀귀신 설화 - 산과 신령을 두려워한 마음
경상도의 깊은 산, 특히 지리산과 화왕산은 단순한 지리적 공간을 넘어 신비한 존재가 깃든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높은 산을 단순히 자연이 아닌 ‘신령이 깃든 곳’으로 인식했고, 그 신령이 때로는 인간을 벌하거나 구제하는 존재로 나타났습니다. 대표적인 설화가 화왕산 처녀귀신 이야기입니다.
밀양 화왕산 자락의 한 마을에는,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죽은 처녀가 귀신이 되어 산을 떠돌며 사람들을 홀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조선 중기, 화왕산을 지나다 실종되는 나그네나 짐승들이 자주 생기자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처녀를 위한 제사를 올렸고, 일정 시기에는 산에 오르지 않도록 금기령을 내렸습니다. 마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산이 화를 내면 사람을 데려간다"며 산에 대한 두려움과 존중을 동시에 가르쳤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지리산은 조선 후기부터 "신선이 머무는 산"이자 "귀신이 사는 산"이라는 이중적 상징으로 설화에 자주 등장합니다. "지리산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돌아왔지만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설화로 남아, 오늘날에도 ‘지리산 귀신’이라는 표현이 무속신앙 속에 살아 있습니다.
이러한 산귀신 설화는 단지 무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야 하며, 산은 살아 숨 쉬는 존재라는 자연에 대한 경외의 표현이자, 공동체의 질서 유지 장치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지리산과 화왕산 일대에서는 이 설화를 바탕으로 한 문화행사, 탐방로 안내, 전시 등이 진행되며 관광자원으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해운대 최치원 바위와 용왕 전설 - 바다, 문인, 신령의 삼중 신앙
부산 해운대는 오늘날에는 유명 해변 관광지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용왕과 문인이 교류하던 신성한 장소로 인식되었던 곳입니다. 그 중심에는 ‘최치원 바위’라는 지명과 함께 흥미로운 전설이 존재합니다.
설화에 따르면, 신라 말~고려 초까지 활동한 학자 최치원은 학문과 도술에 능했으며, 바다를 다스리는 능력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시대 동래부의 기록에서는 "바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최치원이 매년 기도를 드렸고, 용왕이 응답해 태풍을 막았다"는 전승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조선의 유교 사회에서도 여전히 도교적 기운과 신격화된 인물에 대한 민간 신앙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해운대 해안의 ‘최치원 바위’ 앞에서는 매년 음력 6월 제사를 올렸으며, 해안 마을 주민들은 풍어와 재난 방지를 위해 용왕과 최치원을 함께 모시는 제의를 이어갔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최치원이 단순한 인물이 아닌 ‘해신의 대리자’로 격상되어, 일부 지역 무속인들이 그를 모시는 굿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이 설화는 흥미롭게도 세 가지 상징을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첫째, 최치원이라는 유교 지식인의 신격화.
둘째, 용왕이라는 전통적인 자연신앙.
셋째, 공동체 제의와 마을 공동체의 결속 기능.
이는 조선 민중의 복합적인 신앙 세계, 즉 유교·도교·무속이 공존하던 실생활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오늘날 해운대구는 ‘최치원 신화길’을 조성하고, 여름축제와 문화재 야행 행사에서 이 설화를 스토리텔링 콘텐츠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민담이 현재 지역문화 콘텐츠로 재탄생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안동 하회마을, 부용대의 신령한 학 - 풍수와 신화가 살아 있는 마을

경상북도 안동 하회마을은 유교 양반 문화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마을에는 자연을 신성시하는 풍수적 전설과 설화가 다수 존재합니다. 그중에서도 ‘부용대의 학 설화’는 조선 후기까지 마을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하회마을을 감싸는 낙동강 건너편의 절벽 부용대에 신령스러운 학이 살고 있었으며, 이 학이 하늘을 날면 마을에 경사가 생기고, 나타나지 않으면 재앙이 따른다고 믿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실제로 매년 음력 9월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유교 가문의 문중 문서에도 남아 있습니다.
또한 하회마을의 전체 구조가 태극 문양을 닮았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이러한 자연 지형과 전설은 마을 주민들에게 "이 땅은 하늘이 내린 명당"이라는 신념을 부여하였고, 이는 조선 양반의 공간관과 풍수 사상이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하회탈과 탈춤극도 설화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각시탈, 양반탈, 백정탈은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실제 공동체의 신화적 인물로 간주되어 귀신을 쫓고 마을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조선 민중의 풍자와 신앙, 그리고 집단 심리가 응축된 형태로, 구비문학과 민속예술, 설화가 융합된 상징체계였습니다.
현재 하회마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마을 전설을 기반으로 하는 해설 프로그램, 탈춤공연, 전통가옥 체험 등이 꾸준히 이어지며 세계인들에게 조선의 정신세계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상도 지역에 전해지는 다양한 설화는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조선 민중의 감정, 두려움, 믿음, 삶의 철학이 집약된 이야기입니다. 지리산 귀신은 자연에 대한 경외, 최치원과 용왕은 인간과 자연의 공존, 부용대의 학은 공간에 대한 영적 신념을 상징합니다.
설화는 또한 지역 공동체의 결속 도구였으며, 나아가 오늘날에는 관광, 교육, 콘텐츠 산업에서 지역 브랜드로 활용되는 중요한 문화 자산입니다. 과거 조선의 사람들이 전하던 이야기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으며, 우리의 삶과 도시, 마을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