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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천년 역사 여행 (원효대사, 통일신라 유적, 경주 문화재)

by gohappyjan 2026. 2. 20.

경주 월지
경주 월지

경주는 신라 천년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역사 도시입니다. 황룡사지와 분황사, 대릉원과 월정교 등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 김유신 장군의 충절, 원성왕의 꿈 이야기까지, 경주의 유적지마다 신라인의 삶과 신앙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경주의 주요 문화재와 그 속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고, 천년 고도가 현대에 던지는 질문을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

원효대사의 발자취와 황룡사의 역사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로, 진흥왕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자 절로 바꾼 곳입니다. 진흥왕은 무려 17년에 걸쳐 황룡사를 완성했고, 이후 100년 동안 계속 증축하여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황룡사에는 두 가지 보물이 있었는데, 첫째는 장육상이라는 거대한 불상이었습니다. 인도의 아육왕이 황철 57,000근과 황금 3만 분을 배에 실어 보내며 "인연이 있는 땅에서 장육상을 만들어 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이것이 신라 해안에 도착하여 장육상이 완성되었습니다. 둘째는 선덕여왕 때 자장 스님이 세운 황룡사 구 층 목탑입니다. "신라 주변 아홉 나라가 신라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세워진 이 탑은 신라의 위상을 상징했습니다. 원효 스님은 6두품 귀족 출신이었지만 진골 출신 승려들에게 주류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실력으로 황룡사에서 금강삼매경론을 설법하며 여러 스님들을 제압했습니다. 원효 스님의 법명은 "불교의 새벽을 이끈다"는 의미이며, 본명은 설서당이었습니다. 원효 스님은 중국 유학을 가던 중 무덤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이는 삼국유사가 아닌 중국의 송고승전과 일본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은 고구려를 거쳐 유학을 가려다 첩자로 잡혀 실패했고, 10년 후 백제를 통해 다시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폭풍우를 만나 무덤에서 이틀 밤을 보내며 원효 스님은 깨달음을 얻고 귀국했고, 의상 스님만 유학길을 이어갔습니다. 원효 스님은 스승 없이 혼자 깨달음에 이른 독학의 성인이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저서만 20여 권이지만 실제로는 80여 가지 책을 썼다고 전해집니다. 원효 스님은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아 보리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 뜻을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알아채고 과부가 된 딸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게 했습니다. 원효 스님이 궁궐로 가던 중 월정교에서 강물에 빠져 옷이 젖자, 요석궁에서 옷을 말리며 머물게 되었고 그 사이에서 설총이 태어났습니다.

황룡사 주요 보물 설명 역사적 의미
장육상 인도 아육왕이 보낸 철과 황금으로 제작한 거대 불상 국제 교류와 신라 불교의 위상
구층목탑 자장 스님이 세운 9층 탑 신라의 통일 의지와 국력 상징

원효 스님은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으며 스스로 파계했다고 선언하고 법복을 벗었습니다. 그는 "소성거사"라 자칭하며 백성들 사이로 들어갔습니다. "소성"은 마음이 좁은 보통 사람을 뜻하고, "거사"는 집에 머물며 수행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원효 스님은 6두품 귀족이었지만 스스로를 지극히 낮추며 무애가를 부르며 백성들과 어울렸습니다. 이는 삼국 통일 과정의 긴 전쟁으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원효 스님은 한 번도 한반도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의 가르침은 중국과 일본에 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 고산사에는 원효 스님의 가장 오래된 초상화가 보관되어 있는데, 주름진 얼굴과 까무잡잡한 피부에서 백성들과 함께한 삶의 흔적이 드러납니다.

통일신라 유적과 대릉원의 이야기

대릉원은 경주의 대표적인 고분군으로 천마총과 황남대총이 유명합니다. 그러나 대릉원 안에는 문을 열고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고분이 있습니다. 바로 신라 13대 왕 미추왕릉입니다. 미추왕은 김 씨로서는 최초의 신라 왕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석씨가 왕위를 이어왔지만, 아들이 없어 사위였던 미추왕이 왕위에 올랐고, 정치를 잘한 후 다시 석씨인 유례왕에게 왕위를 넘겼습니다. 유례왕 때 청도의 이서국이 신라를 침략했을 때, 어디선가 귀에 대나무잎을 꽂은 병사들이 나타나 적을 물리쳤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그 병사들은 사라졌고, 미추왕릉 앞에 대나무 잎이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미추왕이 신라를 구하기 위해 병사들을 보낸 것이라 믿었습니다. 또한 김유신 장군이 해공왕 때 자손 김융이 반란을 일으켜 집안이 풍비박산 나자, 회오리바람을 타고 미추왕릉으로 가서 하소연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김유신 장군은 "평생 나라를 위해 헌신했는데 내 자손이 죄 없이 죽임을 당했으니 신라를 떠나겠다"고 했지만, 미추왕이 "나와 그대가 아니면 누가 신라를 지키겠는가"라며 달래 마음을 돌렸습니다. 이후 해공왕이 김유신 장군의 무덤에 사과하고 후손의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무덤은 경주에서 손꼽히는 넓은 터에 정성스럽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이 왕도 아니었는데 이처럼 큰 무덤을 가진 이유는 통일신라를 이룬 그의 공로 때문입니다. 김유신 장군이 미추왕릉을 찾아간 이유는 미추왕이 김씨 왕의 시조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신라 왕들은 대부분 김씨였고, 미추왕은 김씨 왕실의 상징적 조상으로 존경받았습니다. 원효 스님은 오랫동안 골굴사에 머물렀고, 마지막에는 골굴사에서 열반에 들었습니다. 골굴사는 경주 동쪽 바다 감포로 가는 길에 있으며, 입구부터 스님들이 선무도를 수련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선무도는 스님들의 무예이자 수행법으로, 중국 소림사처럼 많은 외국인이 이곳에서 선무도를 배우고 있습니다. 골굴사 안쪽으로 들어가면 자연적인 석굴 사원이 나오는데, 제일 위에는 보물로 지정된 마애불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원효 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설총은 아버지를 화장하고 유골을 가루로 만들어 흙과 섞어 소상을 만들었습니다. 소상은 채색하지 않은 조각상을 의미합니다. 설총은 이 소상을 분황사에 모셔놓고 예를 올렸는데, 하루는 원효 스님의 소상이 고개를 돌려 아들을 바라봤다고 합니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쓸 때까지도 그 소상은 고개를 돌린 채로 분황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안타깝게도 현재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인물 주요 사건 관련 유적
미추왕 김씨 최초 왕, 대나무잎 병사 전설 대릉원 미추왕릉
김유신 통일신라 공신, 미추왕릉 하소연 김유신 장군묘
원효대사 소상 제작, 설총과의 부자 인연 골굴사, 분황사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세운 사찰로, 몽골 침입과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모전석탑이 웅장한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분황사 정면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특별한 우물이 있습니다. 보통 우물은 돌을 쌓아 만들지만, 이 우물은 거대한 화강암 하나를 깎아 만든 것으로 폭이 1m 가까이 됩니다. 화강암은 매우 단단한 돌이기에 이를 깎아 우물을 만드는 데 엄청난 노력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 우물은 천년이 넘었으며 얼마 전까지도 관람객들이 물을 길어 마실 수 있었습니다.

경주 문화재와 원성왕의 괘릉

괴링은 경주 외곽에 위치한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시신을 놓는 관을 괴어놓았다고 하여 괴릉이라 불립니다. 괴릉은 조선왕릉처럼 격식을 갖춘 근사한 무덤으로, 석수와 문인상, 무인상이 무덤을 지키고 있습니다. 특히 무인상은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 당시 통일신라에 서역인들이 많이 드나들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경주 외곽까지 찾아오는 이유는 바로 이 독특한 무인상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원성왕의 본명은 김경신으로 재상 밑의 이인자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꿈에서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쓰고 12현 가야금을 들고 청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 해몽을 부탁하자 해몽 사는 "벼슬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힐 꿈"이라고 했습니다. 김경신은 두려워 집 밖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찬 벼슬의 아랫사람이 찾아와 다시 해몽을 해주었습니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로 사람이 없다는 뜻이고, 흰 갓은 왕관을 뜻합니다. 12현의 가야금은 당신이 미추왕의 12대손으로 왕이 될 것이며, 우물은 궁궐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김경신은 믿기 어려웠지만, 그 사람의 조언대로 북천의 신에게 몰래 제사를 지냈습니다. 얼마 후 선덕왕이 죽자 다음 왕 후보는 재상 김주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주원의 집이 북천 건너에 있었고, 마침 큰 비로 북천이 범람하여 궁궐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틈을 타 김경신이 궁궐에 들어가 왕의 즉위식을 치르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원성왕입니다. 원성왕은 꿈을 통해 왕이 된 만큼 정치도 잘했습니다. 원성왕 10년경, 두 여인이 찾아와 "중국 사신이 우리 남편인 용 세 마리를 물고기로 만들어 가져가려 한다"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원성왕은 하양 근처에서 사신 일행을 잡아 "우리나라 용을 어찌 데리고 가느냐"며 윽박질러 용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이 세 마리 용 중 하나가 분황사 우물에 살던 용이었습니다. 월정교는 원효 스님이 궁궐로 가다가 강물에 빠진 곳으로, 현재는 근사하게 복원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입니다. 낮 풍경도 아름답지만 야경이 더욱 근사합니다. 월정교 우측에는 교촌 한옥마을과 경주 최 씨 종가가 있으며, 그 근처에 요석궁이라는 한정식 집이 있습니다. 이곳이 요석공주가 머물던 요석궁이라는 주장과, 경주 최씨 종가 자리가 실제 요석궁 터였다는 주장이 공존합니다. 이곳을 걸으며 원효 스님과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 설총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유적지 위치 특징
괴릉 경주 외곽 울산 방향 원성왕 무덤, 서역인 무인상
월정교 경주 시내 원효 스님 강물 추락 장소
골굴사 감포 방향 선무도 수련, 원효 열반지

설총의 무덤은 보문단지 근처에 있습니다.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후손의 꿈에 무덤 위치가 나타나 마을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해 발견되었습니다. 보문단지를 산책하다 보면 설총의 무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원효 스님의 서당화상비는 고선사가 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일부 조각만 발견되었습니다. 원효 스님의 본명은 설서당이었고, 성은 설 씨였습니다. 서당화상비의 조각들은 현재 아랫부분은 국립경주박물관이, 윗부분은 동국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어 이산 상태입니다. 고선사 터에서 발견된 탑은 경주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경주는 황룡사지, 분황사, 대릉원 미추왕릉, 김유신 장군묘, 괴릉, 월정교, 골굴사, 보문단지 등 곳곳에 신라의 역사가 살아 숨 쉽니다. 경주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신라인의 삶과 신앙, 정치와 문화가 켜켜이 쌓인 살아있는 역사책입니다. 그러나 경주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과거의 영광에 머물러 있습니다. 천년의 시간은 자랑이지만, 그 시간을 현재와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문화재 보존과 주민의 삶, 관광 개발과 원형 보존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경주는 과거를 보존하는 박물관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현재와 공존하는 살아있는 도시가 되어야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실제 역사적 사실인가요? A. 삼국유사에 원효 스님이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월정교에서 강물에 빠져 요석궁에서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설총은 실존 인물로 신라 유학의 기초를 세운 학자였으므로, 원효와 요석공주의 인연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Q. 경주에서 꼭 방문해야 할 문화재는 어디인가요? A. 황룡사지, 분황사 모전석탑, 대릉원 천마총과 미추왕릉, 월정교, 골굴사, 괘릉의 서역인 무인상, 김유신 장군묘 등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분황사의 화강암 우물과 골굴사의 석굴 사원, 괴릉의 독특한 무인상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귀중한 유적입니다. Q. 경주 문화재 관람 시 주의할 점은 무엇인가요? A. 대릉원과 같은 고분군은 입장 시간이 정해져 있으며, 일부 문화재는 보존을 위해 내부 출입이 제한됩니다. 월정교는 야경이 아름다우므로 저녁 시간대 방문을 권장하며, 골굴사는 선무도 수련 시간을 확인하고 방문하면 좋습니다. 문화재 촬영 시 플래시 사용을 금지하는 곳도 있으니 안내 표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TWY0ii5_dw0&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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