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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적지와 위인 이야기 (집안, 평양, 위인)

by gohappyjan 2026. 1. 9.

고구려는 기원전 37년부터 서기 668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고대 왕국입니다. 수많은 전쟁과 외세의 침략 속에서도 꿋꿋이 자주성을 지켜온 고구려는, 오늘날에도 그 유적지와 위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역사적 자긍심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 지린성의 집안과 북한의 평양은 고구려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대표 유적지이며, 이곳에는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구려의 주요 유적지인 집안과 평양, 그리고 그 속에 살아 숨 쉬는 고구려 위인들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고구려 평양 모습
고구려 평양 모습

 

집안: 고구려 초창기의 수도, 유적의 보고

 

집안(集安)은 고구려 초기 왕도였던 국내성이 위치한 곳으로, 고구려의 국가 체제가 본격적으로 정비되던 3~4세기 무렵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은 현재 중국 지린성에 속하지만, 역사적으로는 고구려의 정치·군사·문화적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고구려의 위엄을 증명하는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어 ‘고구려 유적의 보물창고’라 불릴 정도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유적은 바로 광개토대왕릉과 광개토대왕비입니다. 광개토대왕릉은 거대한 석실 봉토분으로, 주변에는 수많은 돌기둥과 석재들이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 능의 정확한 주인은 학계에서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그 크기와 위용만으로도 고구려 왕권의 위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광개토대왕비는 414년에 그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기념비로, 높이 약 6.39m, 너비 1.35m에 이르는 거대한 석비입니다. 이 비문에는 광개토대왕의 치적과 영토 확장, 외적 격퇴 등의 업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고대 동북아 국제 정세를 이해하는 데 핵심 사료로 평가받습니다.

이 외에도 집안에는 약 12,000기에 달하는 고분군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는 ‘장군총’이라 불리는 대형 석실분도 포함되어 있는데, 높이 11m에 이르는 피라미드형 구조로, 고구려의 뛰어난 석축 기술과 건축 감각을 보여줍니다. 고분 벽화에는 무사, 사냥 장면, 천문도, 연회 장면 등 다양한 생활상이 담겨 있어 당시 사람들의 문화 수준과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적지와 관련된 대표 위인은 단연 광개토대왕(재위 391~413)입니다. 그는 즉위 후 북으로는 거란, 남으로는 백제·왜·신라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특히 신라를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해 준 ‘신라 원병’은 이후 한반도 남부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계기가 됩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를 명실상부한 동북아시아 강국으로 끌어올린 지도자로, 집안 일대 유적지는 그의 리더십과 업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평양: 고구려 중흥기의 정치·문화 중심지

고구려는 427년, 장수왕의 결정으로 수도를 국내성(집안)에서 평양성으로 이전합니다. 이는 단순한 수도 이전이 아니라 고구려의 정치 체제를 재편하고, 새로운 전성기를 열겠다는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평양은 한반도 중부와 중국 대륙 사이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고구려의 내정 강화와 외교 확대에 최적의 위치였습니다.

평양에는 수많은 고구려 유적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으로 평양성, 대성산성, 안악 3호분, 덕흥리 고분, 쌍영총 등이 있습니다. 이들 유적은 고구려 후기의 정치·문화·종교 생활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들입니다.

특히 안악 3호분은 벽화의 정교함과 보존 상태로 유명합니다. 이 무덤은 귀족 혹은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며, 내부 벽화에는 주인의 생애뿐 아니라, 당시 의식주, 음악, 무용, 병사들의 훈련 모습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벽화 고분은 고구려인의 생활과 정신세계를 생생하게 전하는 문화유산으로 평가받습니다.

장수왕(재위 413~491)은 광개토대왕의 아들이자, 고구려를 실질적인 최전성기로 이끈 인물입니다. 그는 수도 이전과 함께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문화와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남진 정책을 통해 백제의 수도 한성(서울)을 함락시키고, 백제의 왕을 전사시킴으로써 한반도 남부에 고구려의 영향력을 확고히 했습니다.

장수왕의 통치 하에 고구려는 전성기를 누렸으며, 그의 평양 정치는 이후 수백 년간 고구려 정치·문화의 표준이 됩니다. 특히 수도를 남하한 것은 고구려가 단순한 북방 민족이 아닌, 한반도 전역에 걸친 통일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습니다.

 

 

위인: 유적 속에 살아 숨 쉬는 고구려의 인물들

고구려의 유적지를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단순한 돌무더기나 그림이 아닌, 인물들의 숨결과 삶의 철학이 녹아 있습니다. 집안의 무덤 벽화 속 무사, 평양의 석비 속 정치가, 전투의 흔적이 남은 강가마다 위인들의 이야기와 업적이 서려 있습니다.

먼저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명장으로, 612년 수나라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살수대첩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인물입니다. 그는 수나라 장군 우중문에게 보낸 오언절구 ‘신에게는 아직 12만의 병사가 남아 있사옵니다’로 유명하며, 이는 단순한 문학이 아닌 심리전이자 외교 전략이었습니다. 비록 을지문덕의 직접적인 유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전략과 리더십은 고구려 국방의 상징으로 전해집니다.

또 다른 인물, 온달 장군은 전설 속 ‘바보 온달’이 아닌, 실존한 고구려 장수입니다. 평민 출신임에도 무예와 충성을 인정받아 공주와 혼인하고, 고구려 왕실의 일원이 되었으며, 백제와의 국경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고구려가 신분보다는 능력과 충성을 중시했던 개방적인 문화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은 유적으로 업적이 남아 있지만, 을지문덕과 온달은 이야기와 전설, 그리고 간접적인 기록을 통해 그 삶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구려 위인들은 단지 군주나 장수가 아니라, 고구려의 정신을 형성한 문화적·정신적 리더들이기도 했습니다.

 

고구려는 단순히 영토가 넓었던 나라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유적을 남긴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위대한 위인들의 리더십이 존재합니다. 집안은 고구려의 기틀을 세운 왕국의 시발점이며, 평양은 그 문화와 정치의 절정을 상징합니다. 이 두 도시는 고구려의 시작과 전성기를 보여주는 핵심 공간이며, 광개토대왕, 장수왕, 을지문덕, 온달 같은 인물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그 진면목을 더욱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역사덕후라면, 유적지를 단순히 관광지가 아닌 살아 있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바라보고, 그 속에 녹아든 위인들의 정신과 역사를 스스로 체험하며 가슴 깊이 새겨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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