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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외교 전략 (서희의 담판, 양규의 저항, 강감찬의 승리)

by gohappyjan 2026. 1. 31.

강감찬 귀주대첩
강감찬 귀주대첩

 

고려 시대 거란과의 세 차례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외교, 전략, 희생이 복합적으로 얽힌 역사적 사건입니다. 서희의 담판은 전쟁 없이 강동 6주를 얻어낸 외교의 정수였고, 양규 장군은 700명의 결사대로 7천 명의 백성을 구해냈으며, 강감찬은 귀주대첩에서 망치와 모루 전술로 거란군을 격파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웅 서사 이면에는 반복되는 외침과 구조적 한계라는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서희의 담판: 국제 정세를 읽은 외교 전략


서희는 고려 외교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993년 거란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론과 땅을 떼어주자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서희는 "한번 싸워본 후에 다시 논의를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며 신중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안융진 전투에서 발해 출신 대도수 장군이 거란군을 막아낼 것이라 확신했고, 실제로 안융진은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고려가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증명한 후, 서희는 거란의 소손영과 담판에 나섰습니다.
소손영은 "고려는 신라를 이어 들어선 나라인데 왜 북쪽으로 땅을 넓히려 하느냐"라고 추궁했습니다. 이에 서희는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고려라 했지 않느냐. 고구려 땅을 되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응수했습니다. 이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소손영이 다시 "왜 가까운 거란과 통교하지 않고 먼 송나라와만 교류하느냐"라고 묻자, 서희는 "그것은 거란과 친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중간에 여진이 막고 있기 때문"이라 답했습니다. 거란이 원하는 것은 고려와의 통교였고, 서희는 그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여 "여진만 제거해 준다면 통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며 책임을 상대에게 넘겼습니다.
이러한 담판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서희의 국제 정세 분석이 있었습니다. 당시 거란은 송나라를 압박하고 있었고, 양쪽에 적을 두는 것은 전략적으로 불리했습니다. 거란은 고려를 자기편으로 만든 후 송과의 전면전을 원했던 것입니다. 서희는 이를 간파하고 거란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강동 6주 280리의 땅을 얻어냈습니다. 원래 땅을 떼어주자던 논의가 오히려 땅을 얻는 결과로 바뀐 것입니다. 서희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대 지원을 요청했지만 송이 거절하자, "그렇다면 우리도 할 수 없다"라며 거란과의 관계 전환 책임을 송에게 돌렸습니다. 이처럼 서희의 외교는 힘의 과시, 상대의 니즈 파악, 국제 정세 활용이라는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였습니다.


양규의 저항: 700명이 지켜낸 7천 명의 생명


1010년 거란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재침하자, 고려는 흥화진에서 첫 전투를 맞이했습니다. 15,000명의 고려군이 40만 대군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지만, 양규 장군은 성을 굳게 지켜 거란군의 진격을 막아냈습니다. 거란군은 흥화진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수도 개경을 향해 우회했고, 통주와 곽주에 병력을 남겨두었습니다. 이때 양규는 대담한 작전을 펼쳤습니다. 흥화진 수비병 중 부모와 자식이 없는 700명의 결사대를 선발하여 야간에 성을 빠져나가 통주를 기습 공격한 것입니다. 양규의 700명 부대는 통주에 주둔하던 거란군 만 명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혀 있던 고려 백성 7천 명을 구출했습니다. 이어 곽주까지 점령하며 거란군의 보급로를 차단했습니다.
양규 장군은 "적의 군세가 아무리 많다 해도 좁은 길목을 막고 버티면 결국 무너지는 것은 적이 될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는 영화 '300'의 테르모필레 전투를 연상케 합니다. 스파르타의 300명이 좁은 협곡에서 페르시아 100만 대군을 막아냈듯, 양규의 700명 역시 지형을 활용해 수적 열세를 극복했습니다. 양규는 거란군과 맞서 싸운 한 달간 일곱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총 3만 명의 고려 백성을 구출했습니다. 하지만 개경에서 철수하는 거란군과의 최후 전투에서 양규와 그의 부대 전체가 전사했습니다.
양규 장군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유는 2차 침입 당시 고려가 수도까지 함락당하는 굴욕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고려 입장에서 2차 침입은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양규의 저항은 후방 교란을 통해 거란군의 전략을 무력화시켰고, 결국 거란군 철수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영웅 서사에 가려진 진정한 희생자이자 수호자였습니다.


강감찬의 승리: 망치와 모루 전술의 완성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이끈 3차 침입에서 고려는 철저한 대비를 마쳤습니다. 강감찬 장군은 흥화진에서 거란군에게 타격을 입힌 후 귀주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귀주대첩의 핵심은 '망치와 모루 전술'이었습니다. 거란군은 기병 중심이었고 고려군은 보병 중심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기병이 보병을 압도하지만, 강감찬은 본진의 보병 부대가 거란 기병을 정면에서 막아내는 동안 소수의 고려 기병이 후방을 공격하는 협공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모루 위에 철을 올려두고 망치로 두들기면 강철도 깨지듯, 전후방에서 협공당한 거란군은 무너졌습니다.
귀주대첩 결과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 명에 불과했고, 거란 황제는 소배압에게 "네가 적을 가볍게 여겨 패했으니 낙가죽을 벗겨 죽이겠다"며 분노했습니다. 이는 거란이 얼마나 참담한 패배를 당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강감찬의 승리는 전술적 우수성뿐 아니라 철저한 준비와 병사들의 사기가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3차 침입 이후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공하지 못했고, 고려는 북방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정기를 맞이했습니다.
## 결론: 영웅 너머의 구조적 질문
서희, 양규, 강감찬은 고려를 지켜낸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웅의 등장이 반복되었다는 것은 구조적 문제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왜 고려는 세 차례나 같은 위기를 겪어야 했을까요. 하공진은 거란 황제 앞에서 "나는 고려인이다. 어찌 두 마음을 먹겠느냐"며 죽음을 택했고, 수많은 병사와 백성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승리를 단순히 미화하기보다는, 왜 제도적 대비가 부족했는지, 외교 정책이 일관되지 못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영웅 서사는 감동을 주지만, 영웅에 의존하지 않는 성숙한 국가 체계가 진정한 안보의 기반임을 역사는 증명합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nbFV6QatCqs&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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