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화는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라, 당대 사회의 가치관, 세계관, 종교관, 정치적 배경까지 담은 복합 문화 콘텐츠입니다.
특히 한국 역사 속 두 거대한 시대인 고려와 조선은 설화의 형태, 내용, 기능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본 글에서는 고려 설화와 조선 설화를 대표 사례 중심으로 비교 분석하며, 각 시대의 정신문화와 설화의 현대적 활용 가능성까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고려 설화: 불교적 세계관과 초월성의 문학
고려시대(918~1392)는 불교를 국교로 삼고 천년 왕조를 꿈꾸던 시기였습니다. 설화는 단지 흥미 위주의 이야기가 아닌, 불교 교리를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고, 국왕과 국가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매체로 적극 활용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대표 설화집은 『삼국유사』로, 승려 일연이 구술로 전해지던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 설화의 가장 큰 특징은 불교 사상과 초월적 존재의 빈번한 등장입니다. 인간이 부처, 보살, 귀신, 도술사, 용왕 등과 직접 만나거나 영향을 받는 구조가 흔하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전개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대표적으로 『삼국유사』에 실린 「만복사저포기」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죽은 여인과 매일 밤 저포놀이(주사위 놀이)를 한다는 기묘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 설화는 죽음과 삶,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영혼의 존재와 사후세계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고려인의 인식을 보여줍니다.
이 밖에도 「김현과 호랑이」는 도술을 부리는 주인공이 무서운 호랑이를 퇴치하면서 신묘한 능력을 지닌 인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이는 단순한 용맹담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도술과 덕행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관을 보여주는 예로, 당시 사람들이 무속과 도교, 불교가 혼합된 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학 자산입니다.
고려 설화는 또한 사회적 약자나 민중의 소망이 투영된 구조가 많습니다. 신분 상승, 세속적 성공, 하늘의 도움 등은 당시 백성들이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이상을 대리 실현해 주는 장치로 기능했습니다. 이는 문학의 기본 기능인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며, 동시에 종교적 깨달음을 유도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입니다.
문체적으로는 구어체, 반복 구조, 상징적 서사가 많으며, 구전되던 이야기를 승려나 학자들이 기록으로 남기면서 문헌화되기 시작한 것이 특징입니다. 상상력과 신비성, 철학적 성찰이 조화를 이루며, 설화가 단순한 재미를 넘어서 정신적 수양과 지혜 전파의 수단으로까지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설화: 유교적 질서와 현실적 교훈 중심의 구조
조선시대(1392~1897)는 고려와 달리 철저한 유교 중심 사회로 전환되며, 설화의 성격도 실용적이고 도덕 중심으로 변화합니다.
특히 성리학이 지배 이념으로 확립되면서, 사회 전반에 충(忠), 효(孝), 예(禮), 염(廉) 등 유교적 덕목을 강조하는 설화들이 다수 등장하게 됩니다. 조선의 대표적인 설화 문헌으로는 『금오신화』, 『어우야담』, 『이춘풍전』, 『전우치전』 등이 있습니다.
이 중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최초의 한문 소설로 불리며, 설화에서 소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문학 양상을 보여줍니다. 『전우치전』은 도술을 부리는 주인공 전우치가 부정부패한 관료를 처단하며, 풍자와 통쾌함을 결합한 서사 구조로 많은 민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조선 설화는 대체로 현실적인 인물과 상황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 속에서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즉, 착한 이는 보상을 받고, 악한 이는 벌을 받는 구조가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유교 사회가 지향한 도덕적 안정성과 질서 유지라는 통치 이념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 설화는 또한 가부장적 가족 중심의 서사가 강합니다. 효녀가 가문을 구하거나, 어머니의 죽음을 복수하는 자식, 가난하지만 착한 며느리가 복을 받는 이야기 등, 가족을 중심으로 한 도덕적 교훈을 주는 구조가 두드러집니다.
이는 성리학이 강조한 가정 중심 질서와 연결되며, 설화를 통해 백성들에게 이상적인 인간상을 교육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문체 또한 변화하여, 고려 설화에 비해 서사 구조가 정교하고 묘사가 풍부해졌으며, 점차 소설 형식으로 발전합니다. 『홍길동전』이나 『춘향전』처럼 서민 영웅을 다룬 이야기들이 후기로 갈수록 많아졌고, 이는 민중 계층의 사회적 발언권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실학과 계몽주의 분위기의 확산으로 인해, 풍자와 사회 비판 요소가 설화에 본격적으로 반영됩니다. 예를 들어 「양반전」은 양반 계층의 무능함과 허세를 비판하며, 설화가 민중 의식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설화를 통해 본 두 시대의 세계관 차이
고려와 조선의 설화를 비교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세계관의 차이입니다. 고려 설화는 불교적 윤회, 깨달음, 해탈, 도술, 신비 체험 등이 중심이며, 인간과 초월적 존재 간의 교감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환상적 구조를 지닙니다. 반면 조선 설화는 유교적 현실주의, 질서 중심 사회, 도덕 교육, 현실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춘 매우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서사를 보입니다.
고려 설화는 주로 "하늘(혹은 불법)에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수동적 구조를 가지며, 조선 설화는 "인간의 능동적인 실천과 선택"으로 문제를 극복하는 전개를 따릅니다.
이러한 차이는 문학 속 주인공의 성격 차이로도 이어져, 고려 설화의 인물은 운명에 순응하는 반면, 조선 설화의 인물은 운명을 바꾸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또한 설화의 활용 목적에서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고려 설화는 종교 전파, 역사 서술, 민족 정체성 확립이라는 거시적 목적이 강하고, 조선 설화는 가정교육, 도덕 교화, 사회 질서 유지라는 실용적 목적에 충실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 설화는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이 많고, 조선 설화는 사실적이고 교훈적인 구조가 많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곧 문학의 시대 반영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설화는 단지 전승되는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니라, 각 시대가 원하는 인간상과 사회상을 투영하는 창이며, 결국은 문학을 통해 이념과 체제를 강화하거나 민중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통로로 활용되었습니다.
고려와 조선의 설화는 그 시대의 사상, 종교, 정치, 문화가 어떻게 문학에 반영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고려 설화는 상상력과 영성,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조선 설화는 질서와 도덕, 인간관계의 가치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2026년 현재, 이러한 고전 설화들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양한 창작 콘텐츠의 원천이자, 교육적·정서적 자산으로서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두 시대 설화를 비교하여 읽고 해석하는 작업은 우리에게 문학 이상의 깊이와 통찰을 제공하며, 오늘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힌트를 던져줍니다.
설화는 단순한 전승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시대의 거울이자, 인간 삶의 철학적 기록입니다. 지금 우리가 고려와 조선의 설화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그 옛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