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처음 궁예라는 인물을 접했을 때는 "폭군"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드라마나 역사책에서 묘사되는 그의 모습은 대부분 관심법으로 사람을 죽이고, 결국 비참하게 몰락한 광기 어린 군주였으니까요. 하지만 역사를 들여다보니 궁예는 그저 미친 왕이 아니라, 신라 말 혼란기에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삼한 땅의 절반을 차지했던 실질적 영웅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가 부하들에게 배신당하며 역사의 패자로 기록됐는지, 그 과정을 직접 따라가보니 단순한 흥망성쇠 이상의 교훈이 보였습니다.
밑바닥부터 쌓아올린 영웅의 시간
궁예는 신라 왕자 출신이라는 상징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유모 손에 키워지며 숨어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불길한 예언 때문에 죽음을 면했고, 한쪽 눈마저 잃었죠.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됐지만 계율에 구애받지 않는 성격 탓에 결국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그가 처음 몸담은 곳은 반란군 기훤의 휘하였고, 인정받지 못하자 다시 양길에게 투신했습니다.
100명의 병사로 시작해 600명, 3,500명으로 세력을 불려가는 과정은 제가 봐도 놀라웠습니다. 강릉의 대호족 김순식이 궁예에게 무혈항복한 장면은 그가 단순히 무력만 앞세운 인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승려 출신이라는 배경, 빠른 세력 확장으로 쌓인 명성, 그리고 백성들과 동고동락하는 리더십이 결합된 결과였죠. 황해도 패서 지역의 호족 왕융과 그의 아들 왕건까지 귀순하면서 궁예는 명실상부한 신흥 세력의 중심이 됐습니다.
저는 여기서 궁예의 전략이 현실적이었다고 봅니다. 송악을 중심지로 삼아 해상 무역 세력을 끌어들이고, 왕건 같은 능력자를 전면에 내세워 영토를 넓혔습니다. 901년 후고구려를 세우고 고구려 부흥을 내세운 것도 신라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에게는 강력한 명분이었죠.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고 12.5km 규모의 계획 도시를 만든 것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비전이었습니다. 평지에 성을 쌓은 것은 방어보다 소통을 택한 선택이었고, 미륵 신앙을 내세워 종교적 정당성까지 확보했습니다.
권력에 취한 군주의 내리막
하지만 궁예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다시 태봉으로 바꾸고 연호를 여러 번 고친 것은 안정보다 변화를 택한 선택이었는데, 이게 오히려 민심 이탈의 신호탄이 됐습니다. 짧은 시간에 국호와 수도, 연호를 계속 바꾸는 것은 통치의 일관성을 해치는 행위였죠. 제가 보기에 이 시점부터 궁예는 백성보다 자신의 권위를 우선시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미륵불을 자칭하며 금색 두건과 가사를 걸치고, 200명의 승려가 찬불가를 부르며 따르게 한 행보는 종교적 카리스마를 넘어 독재의 영역으로 넘어갔습니다. 경전 20여 권을 직접 지었는데 내용이 "요망하고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를 비판한 석총 스님을 쇠몽둥이로 죽였습니다. 관심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며 숙청을 이어갔고, 심지어 자신의 부인과 두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솔직히 이건 권력에 대한 집착이 광기로 변질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부인을 죽인 것이 혹시 그녀의 친정 호족 세력을 견제하려는 계산이었다 해도, 그런 선택은 내부 균열만 키웠을 뿐입니다. 왕건이 반역을 도모하지도 않았는데 거짓으로 인정해야 살아남은 에피소드는, 당시 궁예 주변이 얼마나 공포 분위기였는지 보여줍니다. 측근 최응마저 왕건에게 "인정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속삭인 장면은, 이미 궁예를 따르던 이들조차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증거였죠.
민심과 신뢰를 잃은 끝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며 궁예는 역사에서 패자로 기록됩니다. 왕건을 추대하는 부하들이 앞뒤로 달려왔고, 기다리는 자만 1만 명이었다는 기록은 민심이 이미 궁예를 떠났음을 보여줍니다. 궁예는 쫓기다 강원도 부양에서 굶주려 보리 이삭을 베어 먹다가 백성들에게 잡혀 죽었다고 전해지지만, 명성산에 남은 전설을 보면 그가 산 속 깊이 들어가 큰 울음을 토했다고도 합니다. 영웅의 말로치고는 너무 비참하죠.
제가 생각하기에 궁예의 몰락은 두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 민심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초반에는 백성과 동고동락하며 지지를 받았지만, 미륵불을 칭하고 관심법으로 숙청을 일삼으며 신뢰를 무너뜨렸습니다. 둘째, 권력의 속성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권력에 집착할수록 반발하는 호족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그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국호와 수도를 자주 바꾼 것도, 부인과 아들을 죽인 것도 모두 권력을 지키려는 몸부림이었지만 결국 고립만 자초했습니다.
궁예를 단순히 폭군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고려 초기 세워진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에는 궁예를 "대왕 전주"라고 적었으니까요. 승자의 기록이 과장했을 가능성도 있고, 초반 그가 보여준 개혁적 면모와 비전은 분명 시대를 읽은 선택이었습니다. 다만 카리스마가 제도 없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 절대 권력은 절대 고립을 부른다는 것을 그는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만약 그가 권력을 절제하고 호족들과의 균형을 유지했다면, 태봉은 고려와는 다른 역사를 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혁신과 광기의 경계가 얼마나 가까운지, 궁예의 삶은 지금도 묵직한 질문을 남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8QK5dWfxLZI&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