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 전환기, 어둠 속에서 조선 여성들에게 교육이라는 횃불을 건넨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김란사입니다. 그녀는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서 이화학당의 닫힌 교문을 열었고, 태평양을 건너 세상을 배웠으며,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웠습니다. 하지만 파리강화회의로 향하던 길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그녀의 삶은 여전히 많은 질문을 남기고 있습니다. 김란사의 교육운동은 진정한 해방이었을까요, 아니면 제한된 조건 속의 진보였을까요.
이화학당, 닫힌 교문을 열다
김란사는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이화학당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이화학당의 금혼 학칙 때문에 결혼한 여성인 그녀의 입학은 번번이 거절되었습니다. 포기하지 않은 김란사는 프라이 교장을 찾아가 횃불을 끄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인생은 이렇게 밤중처럼 깜깜합니다. 나에게 빛을 찾을 기회를 주지 않겠습니까? 어머니들이 배우고 알아야 자식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감동한 프라이 교장은 자비 입학이라는 조건으로 그녀의 입학을 허가했습니다.
김란사가 19살에 시집간 남편 하상기는 17살 연상으로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뒤 그녀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습니다. 인천 감리서 책임자였던 하상기는 개항장 인천에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며 깨어 있는 시각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부인의 공부를 적극 지원하며 이화학당에서 끼니를 거를 때면 하인을 시켜 밥을 배달해 주는 등 외조의 왕이라 불릴 만큼 헌신적이었습니다. 이처럼 김란사의 교육 여정은 개인의 의지와 더불어 주변의 지원이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화학당을 중심으로 한 여성 교육은 주로 기독교 네트워크와 엘리트 계층에 기반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당시 다수 여성들이 겪던 노동 현장의 고통, 경제적 빈곤, 가부장제의 억압과는 직접적으로 맞닿지 못했습니다. 김란사가 열어젖힌 교문은 분명 역사적 의미가 크지만,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었던 여성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교육을 통한 여성 해방이라는 이상은 실제로는 제한된 계층에게만 가능한 특권이었던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란사의 도전은 이후 여성 교육 확대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여성도 배워야 나라가 산다는 신념을 사회에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합니다.
파리강화회의, 독립을 향한 미완의 여정
김란사는 1895년 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에는 친일 내각이 들어서 있었으며, 김란사는 관비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에서 공부했습니다. 1896년 사진에는 많은 유학생들과 함께 찍힌 유일한 여성으로서 김란사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사건으로 친일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내각이 들어서면서 일본 유학생들에 대한 학비 지원이 중단되었고, 김란사도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해야 했습니다.
조선으로 돌아온 김란사는 1896년 서재필이 귀국하여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문을 세우며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특히 서재필의 '미국의 남녀 평등한 활동'이라는 주제의 연설에 감동받은 그녀는 미국행을 결심했습니다. "이 나라 저 나라가 앞다투어 넘보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현대적인 교육만이 살 길이다"라는 신념 아래 1897년 미국에 도착한 김란사는 하워드 대학에서 수학하다가 웨슬리언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1906년 한국 여성 최초로 문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웨슬리언 대학 재학 중 촬영된 사진에는 벽에 태극기가 걸려 있어 조국 독립에 대한 그녀의 염원을 짐작하게 합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고종은 의친왕 이강과 김란사를 파리강화회의 밀사로 파견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1919년 1월 고종이 갑자기 급사하면서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여러 곳에서는 김란사라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황에스더는 "나는 조선 안 여학생을 단합하여 운동을 일으키고 파리강화회의에 하란사 씨를 파견할 기금 모집을 할 겸 귀국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김란사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은 단순한 개인의 여정이 아니라 조선 여성 전체의 독립 의지를 상징하는 행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엘리트 중심의 외교적 접근이었다는 점에서, 민중의 직접적인 저항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비판도 가능합니다. 파리강화회의라는 국제무대는 제국주의 열강의 논리가 지배하는 공간이었고, 약소국의 목소리는 쉽게 묻히곤 했기 때문입니다.
독살설, 47세에 맞이한 의문의 죽음
김란사는 왕실과 깊은 인맥을 맺으며 1910년부터 고종의 통역관으로 활약했습니다. 고종의 곁에서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던 그녀는 파리강화회의를 향해 길을 떠났고, 베이징에 도착해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동포가 마련한 식사 초대를 받은 지 3일 후, 김란사는 47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독립신문은 "의친왕의 밀측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하려고 중국 베이징에 머물던 중 유행성 감기에 걸려 세상을 떴다"라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기록들은 의문을 제기합니다. 신한민보는 "그 죽음의 사유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했고, 경양신문은 "일본인 앞잡이에게 살해를 당했다고 하나 진상은 오리무중에 파묻혀 밝혀지지 않았다"라고 전했습니다. 조선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는 "장례에 참가했던 미국 선교회의 책임자 백케어 의하면 시체가 시커멓게 독약으로 인한 타살로 추측된다"며 "장례를 치르기 위해 베이징에 온 남편 하상기가 베이징에 가는 도중 봉천에서 어떤 동지를 만나 속뜻을 이야기한 게 오히려 그녀가 위해를 입은 원인이 됐다고 한탄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김란사의 죽음을 둘러싼 독살설은 단순한 음모론이 아니라 당시 일제의 독립운동가 탄압 양상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개연성 있는 추론입니다. 파리강화회의라는 국제 무대에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할 인물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1995년 김란사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으나, 그녀가 죽은 지 7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훈장증에는 그녀의 이름이 '하란사'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는 미국 유학 당시 문화에 따라 남편의 성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남편 하상기의 호적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김란사'이며, 2018년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봉안되면서 비로소 김란사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김란사의 삶은 여성 교육과 독립운동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녀가 이화학당 학생들에게 "조선을 밝힐 등불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을 때, 그 말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시대적 사명이었습니다. 이문회라는 여학생 단체를 이끌며 유관순을 비롯한 3·1 만세운동 결사대에게 횃불을 지펴준 것도 바로 김란사였습니다. 정동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하기 위해 미국 동포들로부터 기금을 모은 일 역시 단순한 악기 구입이 아니라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의 실천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파이프오르간의 송풍구 안쪽 공간에서 3·1 만세운동 당시 태극기와 독립신문이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바람이 실현된 상징적 장면입니다.
그러나 김란사의 운동이 주로 엘리트 교육과 기독교 네트워크에 기반했다는 점, 다수 여성의 노동·빈곤 현실과 직접 맞닿지 못했다는 점, 제도 변화를 견인할 정치적 동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은 여전히 한계로 남습니다. '근대적 여성상' 제시는 새로운 규범을 낳아 또 다른 부담을 지웠다는 비판도 가능합니다. 김란사의 실천은 해방이었을까요, 제한된 조건 속의 진보였을까요. 그녀의 유산은 여성 운동의 출발점으로서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그 영향이 어디까지 확장되었는지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김란사가 시대의 금기를 넘어 여성도 배워야 나라가 산다는 신념을 실천했다는 사실이며, 그 횃불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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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FRok5WATVnw&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