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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연과 북간도 교육 (명동학교, 간민회, 독립운동)

by gohappyjan 2026. 3. 1.

독립운동가 김약연
독립운동가 김약연

북간도에 30만 명의 조선인이 정착했던 1917년, 한 유학자는 학교와 교회를 중심으로 자치 공동체를 만들어냈습니다. 중국에서 '간도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김약연 선생입니다. 저는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무장투쟁이 아닌 교육으로 독립을 준비했다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김약연은 1997년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도 선정 되었으며, 공훈전자사료관 홈페이지에서 더 많은 정보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명동학교와 간민회, 교육 중심 공동체의 탄생

김약연 선생은 1883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선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통 유학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1899년 북간도로 건너간 그는 명동촌에 정착하여 1908년 명동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여기서 '명동학교'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는 거점이었습니다.

제가 주목한 부분은 그가 교육을 위해 토지를 세 가지로 나눈 방식이었습니다. 경작지, 학전(학교 운영 자금), 군전(독립운동 자금)으로 구분했다는 점입니다. 쉽게 말해 농사지은 수확물 중 일부는 학생들 교육비로, 일부는 독립전쟁 준비금으로 따로 적립한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로 치면 '목적별 펀드 조성'과 비슷한 선진적 재정 운영 방식이었습니다.

1910년대 북간도에는 조선인이 급증했습니다. 1917년 매일신보 기록에 따르면 30만 명, 1936년에는 80만 명에 달했습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자치 조직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1914년 간민회가 조직되었습니다.

간민회(墾民會)는 북간도 한인 자치기관으로, 김약연 선생이 대표를 맡았습니다. 여기서 '간민회'란 개간한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일종의 지역 자치정부 역할을 했습니다. 간민회는 다음과 같은 일을 했습니다.

  • 인구 조사와 호구 관리
  • 자체 세금 징수 및 재정 운영
  • 생산·판매·소비 조합 운영으로 경제 자립
  • 중국 당국과 협상하여 토지 소유권 확보

저는 이 부분에서 김약연의 전략이 단순히 이상적이지 않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실제로 조합 체계를 만들어 생산부터 판매까지 효율화했고, 중국 관료들과 협상해 법적 권리까지 챙겼다는 점은 실무형 리더십을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독립운동가 하면 투쟁가를 떠올리는데, 제 경험상 이런 행정·경제 감각을 갖춘 인물은 드뭅니다.

313 만세운동과 무장투쟁으로의 전환

1919년 2월 1일, 북간도에서는 국내보다 먼저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습니다. 이는 2월 8일 도쿄 유학생 독립선언, 3월 1일 국내 만세운동보다 앞선 것입니다. 그리고 3월 13일, 용정 서전대야(西甸大野)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일본 측 기록으로는 1만 명, 우리 측 추산으로는 2~3만 명이 모였습니다(출처: 독립기념관).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비폭력 시위였지만, 일본의 압력을 받은 중국 군벌이 무력 진압에 나섰습니다. 결과적으로 18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들의 무덤은 '313 반일의사지묘'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평화 시위가 총칼 앞에서 얼마나 무력했는지 실감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북간도 조선인들은 무장투쟁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1920년 1월 4일, 철혈광복단이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용정으로 운송 중이던 일본 철도 부설 자금 15만 원을 탈취했습니다. 여기서 '15만 원'이란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수십억 원에 달하는 금액으로, 당시 총 한 자루가 30원이었으니 약 5천 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의거를 주도한 최봉설과 동지들은 이 돈으로 연해주에서 무기를 사려 했습니다. 하지만 믿었던 동지 어민섭이 밀정이었습니다. 결국 자금은 되찾기고, 임국정·윤준희·한상호 세 명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사건은 독립운동의 가장 큰 적이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배신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암살〉이 이 사건을 소재로 했습니다.

김약연은 기독교를 받아들였지만, 대종교의 서일 종사와도 협력했습니다. 서일은 북로군정서를 이끌었고, 그 아래 김좌진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솔직히 이 부분에서 김약연의 유연함이 돋보입니다. 유학자 출신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다시 대종교와 손잡는 모습은 이념보다 목표를 앞세운 실용주의였습니다.

1920년대 초 김약연은 일본의 압박으로 중국 당국에 체포되었습니다. 하지만 중국 관료들은 그를 보호하려 했고, 약 3년간 구금 후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출소 후 캐나다 선교부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고, 이를 통해 은진중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은진중학교는 조선어와 조선 역사를 자유롭게 가르칠 수 있었고, 윤동주 시인이 이곳에서 축구 선수로 활약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제 경험상, 교육기관을 통한 민족정신 계승은 무장투쟁 못지않게 중요한 저항이었다고 봅니다.

김약연 선생은 1942년 10월 29일, 7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무덤은 명동촌이 내려다보이고 한반도가 보이는 곳에 자리합니다. 그는 유언으로 "나의 행동이 곧 유언이다"라고 남겼습니다. 저는 이 말에서, 말보다 실천을 중시한 그의 철학을 읽습니다.

김약연의 독립운동은 총칼이 아니라 교육과 조직, 그리고 자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독립운동하면 의열투쟁을 떠올리는데, 실제로 써보니 장기적 인재 양성과 경제 기반 구축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저항이었습니다. 그의 방식은 당장 눈에 띄는 성과를 내기 어려웠지만, 명동학교와 은진중학교 출신들이 313 만세운동, 청산리 전투 등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 효과는 입증되었습니다.

다만 한계도 분명합니다. 교육과 종교 네트워크에 의존한 운동은 지역을 넘어 전국적 정치 역량으로 확장하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무장투쟁과 외교 노선 사이에서 명확한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한 점, 그리고 종교적 가치가 사상적 다양성을 충분히 포용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남습니다. 제 생각에는, 김약연은 전략가이기보다 교육자이자 공동체 리더였습니다. 그의 선택은 단기 성과보다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였고, 그것이 그를 '간도의 대통령'으로 만든 이유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1o-si4LBE48&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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