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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엽 이야기 (광복군, 학원자유, 행동하는지식인)

by gohappyjan 2026. 4. 3.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솔직히 저는 김준엽이라는 이름을 꽤 오래 몰랐습니다. 안창호, 김구, 윤봉길은 교과서에서 배웠지만, 김준엽은 어느 날 우연히 접한 역사 강연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 석 자가 마음에서 쉽게 떠나질 않았습니다. 단순히 용감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평생 지키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수록 묵직하게 가슴을 눌렀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이 된 청년

1923년에 태어난 김준엽은 일본 유학 중 학도병으로 징집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여기서 학도병이란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대학생들을 강제로 전쟁에 동원한 제도를 말합니다. 전선에 끌려가기 전에 탈출을 결심한 그는 준비가 남달랐습니다. 중국 지도를 접어 부적 주머니 안에 숨기고, 나침반과 중국어 회화책을 챙겼으며, 만일 일본군에게 붙잡혔을 때 스스로 자결하기 위한 칼도 품었습니다. 자신이 조선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한복 입은 어머니와의 사진 한 장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하죠. 저는 물론 그 상황을 경험할 수 없지만, 그 준비 목록을 처음 접했을 때 가슴이 서늘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탈출을 계획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1944년 3월 말, 그는 중국 허난성 일대 츠카다 부대를 탈출했습니다. 발각되자마자 총성이 울릴 것을 각오하면서 무작정 북동쪽으로 달렸고, 이후 중국군의 보호를 받아 부양(阜陽)에서 장준하를 포함한 다섯 명의 탈출 동료와 재회했습니다. 이들은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이 있는 임천(臨泉)에 합류했고, 그해 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리한 충칭(重慶)을 향해 출발합니다. 임천에서 충칭까지 이어진 이 여정이 바로 유명한 유천리 장정(遊千里 長征)입니다. 유천리 장정이란 약 2,400km에 달하는 도보 이동으로, 55명이 함께한 이 행군은 혹한의 파총령(巴縱嶺, 해발 3,000m 이상의 험준한 산악 지대)을 넘으며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을 붙잡은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말아야 한다." 김준엽의 경우 이 여정에만 꼬박 열 달이 걸렸습니다.

충칭에 도착한 그는 마침내 광복군이 되었고, 미국 전략사무국(OSS)과의 합작으로 계획된 독수리 작전에 선발되어 훈련을 받았습니다. OSS란 미국의 정보·특수작전 기관으로, 오늘날 CIA의 전신입니다. 국내에 침투해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미군 상륙을 지원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고, 준비하던 작전은 실행 직전에 허사가 됐습니다. "왜놈들을 우리 스스로 몰아내지 못한다는 허탈감." 그 문장이 저에게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이후 그의 삶 전체를 설명하는 서문처럼 읽혔습니다.

학자의 길을 선택한 행동하는 지식인

해방 후 김준엽 앞에는 두 갈래 길이 놓였습니다. 정계에 투신하거나, 학자로 남거나. 그는 중국에 남아 중국 근현대사와 공산주의를 연구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여기서 공산주의 연구란 단순한 이념적 탐구가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를 학술적으로 분석하는 실증 연구를 의미합니다. 1949년 귀국한 그는 고려대학교 교수로 부임해 이후 40년간 자리를 지켰습니다.

제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광복군 출신이 정치판이 아닌 서재를 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랬습니다. 그 시대에 독립운동 경력은 정치 입문의 훌륭한 자산이었을 텐데, 그는 그 카드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려대에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창설하고, 미국 포드 재단의 지원을 이끌어내 연구소를 국제적 수준으로 키워냈습니다. 아세아문제연구소는 이후 아시아 지역학 분야에서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학술 기관으로 성장했습니다(출처: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1972년 남북 적십자회담 당시에는 자문위원으로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중국 현대사와 공산주의 연구의 권위자였기에 가능한 역할이었습니다. 그의 이력을 보면, 학문이 현실에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깊은 곳에서 현실을 움직이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총장직을 걸고 지킨 학원자유

1982년 고려대학교 제14대 총장에 취임한 김준엽은 취임 당일 서무실을 찾았다가 "지금 신임 총장님 취임식이 있어서 바쁩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그 김준엽입니다." 이 에피소드가 처음엔 웃음을 주지만, 생각할수록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는 취임 전부터 한 가지를 굳게 다짐했습니다. "절대로 굴욕적인 총장은 할 수 없다." 당시 고려대는 60억 원에 달하는 부채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산과 집행을 분리하고 총장실 운영비까지 감사를 받게 하는 방식으로 재정 투명성을 확보했고, 기업을 직접 찾아다니며 후원을 이끌어냈습니다. 재임 2년 8개월 동안 완성한 건물 면적이 개교 이래 77년 역대 총장이 지은 총건평의 절반에 달했습니다. 스스로를 "큰 거지"라고 불렀던 그 말이, 제 경험상 진짜 리더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가장 솔직하게 표현한 말 같았습니다.

전두환 정부 시절 강경한 압박이 이어졌습니다. 정부는 총학생회를 학도호국단으로 대체하고 학생 운동 참여자들을 제적시키도록 요구했습니다. 학도호국단이란 군사정권이 대학 자치 기구를 해체하고 관제 조직으로 대체한 학생 통제 제도입니다. 김준엽 총장은 이를 거부했고, 교직원 자녀 입학 가산점으로 입학한 학생들을 제적시키라는 압박에도 학생들 대신 자신이 사퇴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가 총장직을 내놓을 때, 학생들뿐 아니라 교수, 교직원, 심지어 학교 수위까지 함께 시위에 나섰습니다. 그때 시위는 단 한 명의 학생도 연행되지 않고 마무리된 유일한 사례로 기록됩니다. 이처럼 그의 재임 기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박정희 정부 시절 해직된 교수 전원 복직
  • 정부가 요구한 기준 미달 인사에 대한 명예박사 수여 거부
  • 학생 자치 기구 폐지 및 참여자 제적 요구 거부
  • 교직원 자녀 가산점 입학생 보호를 위한 자진 사퇴

은퇴 후에도 이어진 영원한 광복군의 삶

총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정치권의 러브콜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정부의 통일부 장관 제의, 1987년 선거에서는 김영삼·김대중 두 후보 모두의 선거대책본부장 요청,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의 총리 제의까지. 그는 모두 거절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학생들이 아직 감옥에 있는데, 스승이라는 자가 어떻게 총리가 될 수 있는가." 제 경험상 이런 거절은 단순한 겸양이 아닙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은퇴 후 그는 광복군 활동과 자신의 삶을 담은 회고록을 남겼고, 중국 현지에서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는 작업에 힘썼습니다. 봉환이란 타국에서 숨진 인물의 유해를 본국으로 옮겨 안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등 다섯 분의 유해를 국립현충원에 봉안했습니다. 신규식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 수립의 주축이었던 독립운동가로, 국권 상실에 분개해 음독자살을 시도하다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뒤 호를 '예관(睨觀, 한쪽 눈으로 흘겨보다)'으로 바꾸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입니다(출처: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김준엽에게는 처가와도 직접 연결된 분이었습니다.

1987년 구차 개헌(9차 헌법 개정) 당시 그는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그 문구는 지금까지 유효합니다. 2011년, 91세에 폐암 진단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 그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수여되었습니다. 국립현충원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단 두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립습니다."

김준엽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한 가지 질문에 이릅니다. 원칙은 현실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그는 권력과 타협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현실로부터 도망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장 치열한 현실 한가운데에서 원칙을 무기로 싸운 사람이었습니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 그 말이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실제 삶으로 증명된 경우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저에게는 적잖은 위안이었습니다. 지금 어떤 선택 앞에 서 있든, 한 번쯤 이 질문을 꺼내 보시길 권합니다. 역사 앞에 내 선택이 떳떳한가.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ifwVpW38adk&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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