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 평생을 살다가 서대문형무소의 혹독한 추위를 겪은 뒤 해방 후 기업가로 변신한 인물이 있을까요? 저는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이렇게 다양한 역할이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김한복 선생은 일제강점기 교육자로 시작해 독립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에는 '독립문'이라는 기업을 세워 국민을 따뜻하게 입히겠다는 신념을 실천한 인물입니다. 그의 삶은 상징과 실천, 이상과 현실이 어떻게 하나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오산학교 출신 교육자, 독립운동의 길로
김항복 선생은 1916년 평양의 오산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여기서 오산학교란 신민회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승훈 선생이 세운 민족 교육기관으로, 당시 조선인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요람이었습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 학교의 교장이었던 조만식 선생은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고, 그의 영향 아래 김항복은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을 키워갔습니다.
오산학교는 매일 아침 체조와 함께 애국가를 부르며 하루를 시작했고, 이곳 출신으로는 외과의사 백인재, 독립군 김홍일, 목사 주기철, 역사학자 함석헌 등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명단을 보면서, 한 학교가 얼마나 많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교육이 곧 독립운동의 기반이었던 시대였습니다.
김항복은 이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유학했고, 동경유학생학회를 중심으로 2·8 독립선언 준비에 참여하며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습니다. 1920년대부터는 국내 각지를 돌며 과학과 사회 계몽 강연을 펼쳤고, 1927년 종로 기독교 회관에서 열린 '뉴턴에서 아인슈타인까지'라는 강연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수준 높은 내용이었습니다.
귀국 후 그는 조만식 선생의 권유로 평양 숭실학교 교사를 거쳐, 1930년 승인상업학교(이후 승인상업전문학교) 교장을 맡았습니다. 여기서 상업학교란 실업교육을 중심으로 상공업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민족자본 육성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담보로 학교 운영 자금을 마련했고, 사립학교임에도 국공립보다 높은 취업률을 기록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의 추위, 그리고 독립문이라는 다짐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이 터졌습니다. 수양동우회란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흥사단의 국내 조직으로, '무실역행(務實力行)'을 이념으로 내세워 교육과 계몽을 통한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출처: 국가보훈처). 일본은 이 단체를 독립운동의 온상으로 보고 40여 명을 체포했고, 안창호 선생은 이듬해 옥중에서 순국했습니다.
김항복 역시 이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판결문에는 "오산학교 재학 중 교사로부터 감화를 받아 민족주의 사상을 품고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기에 이른 자"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1심 무죄에서 2심 징역 2년으로 형량이 바뀌었고, 그는 포승줄에 묶인 채 머리에 용수를 쓰고 서대문형무소로 향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그가 호송 중에 본 독립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독립문은 1896년 영은문을 허물고 세운 자주독립의 상징이었습니다.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사대의 관문을 없애고, 조선이 스스로 독립국임을 선언한 것이죠. 하지만 그 상징은 일제강점기에는 무력했고, 독립운동가들은 차가운 감방에서 독립의 꿈을 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는 춥고 배고픈 곳이었습니다. 수감자들은 추위를 이겨내지 못해 손발에 동상이 걸리기 일쑤였고, 김한복은 그 추위 속에서 "이 땅에서 추위에 떠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이 다짐이 해방 후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기업가로 변신, 독립문이라는 이름의 실천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북한에는 소련군과 공산주의가 들어왔고, 기독교 신자였던 김항복은 1946년 1월 월남을 결심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내려온 그에게, 과거 승인상업학교 제자들이 편물기 한 대를 건넸습니다. 이것이 대성섬유공업사의 시작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했고, 당시 부산 인구는 원래 30만에서 100만으로 급증했습니다. 살 집도, 먹을 것도, 입을 옷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가 만든 메리아스(knit, 편직물)는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여기서 메리야스란 실을 고리 모양으로 엮어 만든 신축성 있는 편직물로, 당시 방한 내의의 주요 소재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안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회사 이름을 '평안섬유공업사'로 바꾸었고, 로고는 독립문으로 정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본 독립문을 어떻게 기억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상징으로만 남을 수 있었던 독립문을, 그는 국민을 따뜻하게 입히는 기업의 상징으로 되살린 것입니다.
1960년대 수출 제일주의 시대가 열렸고, 김항복은 일찍부터 수출 산업의 가능성을 내다봤습니다. 1963년 스웨덴과 수출 협약을 체결했고, 1969년에는 메리아스 수출 1위, 1971년에는 수출 100억 달러 달성 기념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국내 수출 기업 순위 19위에 오르며, 주식회사 독립문은 최초로 라디오 CM 광고를 내보냈습니다.
기업의 성장 이면에는 사회적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는 실향민 주택조합을 만들어 휘경동에 영락주택을 지었고, 남편을 잃은 여성 가장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습니다. 며느리는 회사 직원 수백 명의 아침·점심·저녁 식사를 챙기며 고생했고, 저녁마다 돼지고기 국을 끓여 먼지 많은 섬유공장 직원들의 건강을 챙겼습니다.
주요 경영 원칙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회사의 가장 큰 목적은 고용 창출이다
- 협력업체와 대리점이 늘면 더 많은 사람이 먹고살 수 있다
- 기업은 세금을 많이 내기 위해 존재한다
김항복의 아들 김세훈은 한국전쟁 때 해병대에 자원입대했고, 미해병대 중위에게 선물 받은 방탄복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전사 통지서가 잘못 날아왔을 때, 김한복은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경험이 그의 사회적 책임감을 더욱 깊게 만들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970년대 2차 오일쇼크와 박정희 대통령 서거로 부도 위기를 맞았을 때, 2세 경영인 김세훈은 아버지의 말을 되새기며 위기를 넘겼고, 3세 경영인 역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경영 철학을 이어받아 회사를 지켰습니다. 현재 독립문의 브랜드 PAT는 'Peace And Textile'의 약자로, 평안을 추구한다는 창립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항복의 삶은 상징과 실천이 어떻게 만나는지를 보여줍니다. 독립문은 자주독립의 상징이었지만, 그 상징만으로는 국민을 따뜻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교육자로, 독립운동가로, 기업가로 살며 상징을 실천으로 바꾸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독립'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정치적 자주뿐 아니라 경제적 자립, 사회적 책임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점을 그의 삶이 일깨워줍니다. 상징은 선언으로 끝나지 않고, 일상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Wa7elRylZsM&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137&t=1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