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1년 한국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 소송을 제기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불륜 상대 남성을 향해서였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100년 전이라는 시간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나혜석이라는 이름 석 자는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선명한 여성 자의식을 남긴 인물로 기록됩니다. 서양화가이자 세계 여행가, 그리고 페미니스트로서 그가 던진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나혜석,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
나혜석은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나 일본 동경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입니다. 1920년대 초반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며 화가로서 이름을 알렸고, 1927년 남편과 함께 떠난 1년 8개월의 세계 여행은 그의 예술 세계를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특히 파리에서 6개월간 머물며 인상파와 야수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작품의 색채가 강렬해지고 터치가 힘 있어졌습니다.
저는 나혜석의 작품 중 '정원'이라는 그림을 처음 봤을 때 그 색감과 구도에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받은 이 작품은 파리 클리니 박물관의 정원을 그린 것인데, 당시 조선 화단에서는 보기 드문 밝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31살의 나이에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세계 여행을 감행한 것 자체가 파격이었지만, 그는 "기운 있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칼날 같은 때 떠나야지 늙어서 내 꼴 남 구경시키러 다니겠는가"라며 주변의 만류를 뿌리쳤습니다.
하지만 이 여행은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이자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던 중 남편의 소개로 만난 독립운동가 최린과 사랑에 빠졌고, 이는 훗날 이혼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1931년 남편 김우영은 간통죄로 고소하겠다며 이혼을 요구했고, 나혜석은 네 명의 자녀 양육권을 모두 빼앗긴 채 이혼당했습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주목한 건 그 시대의 간통죄는 여성에게만 적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남편 역시 외도를 하고 있었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혼고백서와 정조 논쟁
1934년 나혜석은 '이혼고백서'를 발표하며 조선 사회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조선 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나건 못나건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요.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다 한 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흐트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다." 이 글은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파격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100년 전과 지금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나혜석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1만 2천 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당시 물가로 환산하면 수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었습니다. 결국 2천 원을 받고 합의했지만, 불륜 상대 남성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발상 자체가 혁명적이었습니다. 33인 민족대표 중 한 명이었던 최린은 이후 친일파로 변절했고, 나혜석은 그런 그를 향해 끝까지 책임을 물었습니다.
더 놀라운 건 그 다음입니다. 나혜석은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정조는 여성의 선택이고 자유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솔직히 2025년 지금도 이런 주장은 논쟁적인데, 1930년대에 이걸 공개적으로 말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그는 '우의 결혼', '시험 결혼'이라는 개념까지 제시하며 혼전 동거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결혼하는 목적은 한 명의 지압이 혹은 아내를 얻는데 있겠지요. 자녀는 그 부산물에 불과한 것인 줄 압니다"라는 그의 말은 오늘날 딩크족의 철학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회의 반응은 가혹했습니다. 1935년 개인전은 참담하게 실패했고, 작업실 화재로 대부분의 작품이 소실되었습니다. 제 경험상 예술가에게 작품을 잃는다는 건 삶의 일부를 잃는 것과 같습니다. 나혜석은 파킨슨병으로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자식들과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1949년 행려병자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을 때, 그의 나이 53세였습니다. 마지막까지 그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남겼습니다. "사남매 아이들아 애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 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저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여전히 성별에 대한 편견이 뿌리 깊다는 걸 느낍니다. 남성들은 대부분 여성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여성들은 능력이 동등하거나 더 뛰어난데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나혜석이 던진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남자 여자를 떠나서 모든 행동과 능력을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하는 사회 문화가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최근 엑셀이혼이라는 말이 등장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결혼 준비부터 가사 분담, 경제 비율까지 엑셀로 정확히 나누는 부부가 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술가
나혜석은 예술가이기 전에 자신의 삶을 걸작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한 인간이었습니다. 그의 예술적 성취가 사생활 논란에 가려지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동시에 그가 던진 질문이 제도적 변화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한계도 분명합니다. 개인의 해방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나혜석의 삶은 여전히 우리에게 숙제를 남깁니다. 편협한 생각을 버리고 큰 대의를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걸작으로 만들 권리가 있다는 그의 마지막 외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AexCXxRv1RI&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