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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이승훈의 삶 (거상의 길, 교육 독립운동, 민족 자본)

by gohappyjan 2026. 2. 9.

태극기
태극기

 

한국 근대사에서 남강 이승훈은 단순한 부자나 독립운동가를 넘어서는 인물입니다. 역사학자 함석환 선생은 "조선에 이런 위인이 있었음을 조선은 아는가 모르는가?"라고 물었고, 물산장려운동의 조만식 선생은 "그는 조선에 태어나고 조선을 위하여 울고 웃고 조선을 위하여 죽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평안도 정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승훈의 인생은 크게 두 가지 국면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나라를 좌지우지한 거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고, 둘째는 목숨을 건 독립운동가로서의 활약입니다. 그의 삶은 개인의 성공에서 민족의 미래로 시선을 돌린 전환의 역사이자, 교육과 경제를 통한 실력 양성이라는 독립운동의 한 전형을 보여줍니다.

 

고아에서 거상으로: 변화와 도전의 여정

 

이승훈 선생은 태어난 지 채 돌이 되기도 전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 무렵에는 할머니와 아버지마저 연달아 잃으며 고아가 되었습니다. 생계를 위해 그는 임일권(임박)이라는 유기상회의 사환으로 들어갔습니다. 사환은 잔심부름을 하는 가장 낮은 직급이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특히 유기를 닦는 일을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유기가 이렇게 열심히 닦아서 광이 나는 모습을 보면 사람도 열심히 일하면 빛이 날 수 있지 않을까?" 어린 나이에도 그는 자신의 주인처럼 부자가 되어 양반의 지위를 사서 편하게 살고 싶다는 꿈을 품었습니다.
3~4년간 사환으로 일한 그는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바깥 영업과 수금, 사원 관리 등 더 높은 직급으로 올랐습니다. 유기그릇을 외상으로 판매한 후 잔금을 받아오는 일에서도 그는 온갖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돈을 받아왔습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한결같이 자기 역할을 해냈기에 임일권의 신뢰를 얻었고, 장부를 정리하고 작성하는 일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개성상인들만의 독특한 장부 정리 방법인 사계송도치부법을 착실하게 배운 그는 성실함으로 주변에 소문이 나서 15살에 결혼하고 16살에 자립을 시작했습니다.
주인으로부터 숟가락 한 보따리를 외상으로 받아 보부상을 시작한 이승훈은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평안남도, 황해도 지역까지 유기를 팔러 다녔습니다. 그는 각 지역의 수요와 정보를 파악하고, 황해도 은율이나 재령 지역에서는 유기를 팔고 대신 값을 목화로 받아와 평안북도에서 팔아 더 큰 수익을 얻었습니다. 7년간 보부상으로 일한 그에게 임일권은 유기 상회와 공장을 맡아보라는 제안을 했지만, 이승훈은 정중히 거절하고 자신의 일을 해보겠다며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모은 돈으로 유기 상회를 차렸고, 평양에 지점까지 설치하며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직접 유기 공장을 차리기 위해 철산 갑부 오 위순(오삭주)에게 돈을 빌리러 갔습니다. 오 위 순은 돈을 빌리러 온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조상 무덤에 석물을 설치하고 친인척을 거둬 먹인다며 자화자찬했고, 다들 아부했지만 이승훈은 달랐습니다. "후손이 되어서 조상의 무덤에 석물을 설치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입니까? 아무리 돈이 많다 하더라도 친인척을 거둬 먹이고 있다는 게 그렇게 자랑할 만한 일입니까?" 이 당당한 말에 오 위 순은 화가 나 들어가 버렸지만, 며칠 후 그를 찾아와 "자네 말이 옳구먼. 자네 말 덕분에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네. 기꺼이 돈을 꼬워 주겠다"며 거액을 빌려주었습니다.
대규모 유기 공장을 설립한 이승훈은 근로자들에게 좋은 근무 환경과 높은 임금, 적당한 휴식을 제공하며 신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우대했습니다.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고 우대한 덕분에 공장의 성과는 더욱 높아졌고, 그는 큰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이 평양과 정주 지역을 격전지로 만들면서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 보니 유기 공장은 폐허가 되었고 청나라 군대가 유기그릇을 싹 휩쓸어갔습니다. 오 위 순에게 빌린 돈을 채 갚지 못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채무자들은 잠적했지만, 이승훈은 다시 오 위 순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소매 끝에서 장부를 꺼냈습니다. 그 장부에는 현재 재정 상황과 앞으로 어떻게 갚겠다는 계획이 상세히 적혀 있었고, 오 위 순은 그 장부를 덮으며 "돈은 갚지 않아도 되네. 다시 제기하게. 필요한 돈은 내가 다 지원해 주겠네"라고 했습니다.
청일전쟁 후 사람들의 세간살이가 다 없어지면서 유기 수요가 폭발했고, 경쟁업체들이 망한 상황에서 이승훈의 유기 공장은 대박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개항 이후 외국 물품이 들어오면서 석유, 말라리아 약 같은 서양 의약품, 종이, 면포, 건축 자재, 일용 잡화 등을 수입하는 상사를 열어 무역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유기 상회와 무역업을 통해 주요 지역을 연계하는 큰 상업을 시작한 그는 순식간에 거부가 되었고, 관서 지방의 물류와 유통은 모두 그의 손에 달렸습니다. 자본금 70만 냥에 이르는 큰 부를 이룬 그는 꿈을 이루고 조용한 곳으로 이사해 돈을 주고 벼슬을 사서 수능참봉이 되었으며, 오산면에 같은 성씨의 친인척을 모아 집성촌을 꾸리고 2세 교육을 위해 서당을 지었습니다.

단계 나이 주요 활동 핵심 가치
사환 시절 10~13세 유기 상회 잔심부름, 유기 닦기 근면, 관찰
수사 단계 13~15세 영업, 수금, 사원 관리 신뢰, 성실
보부상 16~22세 전국 유기 판매, 지역 정보 파악 도전, 혁신
거상 22세 이후 유기 공장, 무역업, 70만 냥 자본 의리, 상생



그가 거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개성상인들만의 인재양성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사환에서 시작해 수사(영업·관리), 서사(장부 관리), 차인(독립 상인)으로 이어지는 단계적 성장 구조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고, 이승훈도 이 시스템을 거쳤습니다. 또한 사계송도치부법이라는 복식부기 방식은 상품과 자본을 채권과 채무, 매입과 매각으로 구분해 육하원칙에 맞춰 상세히 기록하고, 거래처와 손님의 거래 내역을 장책에 따로 정리하는 선진적 회계 시스템이었습니다. 이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들보다 무려 200년 앞선 것으로, 이러한 체계가 갖춰져 있었기에 그는 나라를 좌지우지할 거부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의를 쫓아: 개인 이익에서 국가 이익으로

 

이승훈이 거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이익보다 무엇이 옳은가를 생각하는 인물이었습니다. 1894년 명성황후 민 씨 정권이 백동화라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면서 관리 부실로 분량화폐와 위조 화폐가 만연해 백동화의 가치는 떨어지고 상평통보(엽전)의 가치가 높아졌습니다. 지역마다 엽전 유통량이 달라 서울에서 엽전 한 냥이 부산에서는 두 냥으로 거래되는 현상이 생겼고, 경제에 앞선 이승훈은 엽전 1만 냥을 싣고 부산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부산 가는 길에 일본 영사관 소속 배와 충돌해 배가 침몰하면서 1만 냥이 바다에 가라앉았습니다. 손해 배상 청구는 1년 넘게 걸렸고, 다행히 1만 냥은 건졌지만 다른 손해 배상은 받지 못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일본 앞에서 우리가 무시당하고 불이익을 당하는 현실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이 상인에게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고 판단한 이승훈은 쇠가죽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에서 쇠가죽이 많이 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끝나면서 사들인 쇠가죽의 가격이 하락하고 재고가 쌓여 또다시 큰 손해를 받았습니다.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거부가 두 차례 연이어 사업에 실패하면서 크게 낙심해 고향에 눌러앉아 있던 그에게, 인생을 바꿀 만남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안창호 선생과의 만남이었습니다.
1907년 안창호 선생이 사람들 앞에서 연설했습니다. "나라가 없는 민족은 세계의 상놈이요. 전 민족이 다 상놈이 되거든 당신 혼자 양반이 될 수 있겠어?" 이승훈은 자신이 양반 지위를 사서 편안히 살려했었는데, 나라를 빼앗기면 모두가 상놈이 된다는 말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나만 잘 살아서 될 것이 아니라 나라가 잘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유기그릇을 쓰고 있었지만, 개항 이후 일본제 사기그릇이 들어오면서 유기그릇은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유기그릇은 비싸고 무겁고 관리가 힘든 반면, 일본제 사기그릇은 품질도 좋고 가볍고 예쁘고 쌌기 때문입니다.
이승훈은 혼자서는 일본제 사기그릇에 맞설 수 없다고 판단하고, 주변의 유기공장 사장들, 유기 상회, 유기 제조 업자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의 경쟁 업체들이었지만, 함께 일본제 사기그릇에 맞서기로 했습니다. 조선 사기그릇을 만들기 위해 기술자와 전문 경영인을 모셔오고, 일본의 경제 침탈에 위기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불러들여 평양에 자기 제조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이 회사를 주식회사로 만들어 더 많은 주식을 발행해 더 많은 사람들과 손을 잡고 함께 힘을 키우고자 했습니다. 혼자 맞서서 혼자 돈을 벌겠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손을 잡고 맞서서 함께 상생하자는 연합 정책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44세였습니다.
황성신문에서는 조선 사기그릇이 아주 우수하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평양군에 자기 회사가 설립된 것은 이미 보도했거니와 얼마 전에 새로 제조한 자기를 서울로 보냈는데 그 품질이 아주 우수하다. 이 자기는 우리나라 물품 제조가 점차로 발달할 효시라고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고 있다." 황성신문을 통해 주식을 추가로 발행해 더 많은 주주를 모집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조선제 사기그릇을 살 수 있도록 함께 힘을 합쳐 일본제 사기그릇 회사에 맞섰습니다. 근대적인 주식회사 시스템과 상인들끼리의 연합, 생산과 유통망의 협력 덕분에 조금씩 빼앗긴 상권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가 1908년이었습니다.
그러나 1910년 우리는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었고, 이후 일본의 물량 공세와 총독부의 탄압으로 결국 2년 만에 평양의 자기 회사는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자기 회사가 일본에 맞설 만한 경쟁력이 있음을 충분히 보여준 시도였습니다. 이승훈의 선택은 단순히 개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민족 자본을 키우고 경제적 자립을 이루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이후 교육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경제와 교육 모두에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려는 실천을 이어갔습니다.


교육과 독립운동: 오산학교와 3·1 운동

 

이승훈이 거부에서 독립운동가로 전환하는 과정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나라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는 자신의 재산을 교육에 쏟아붓기로 결심했습니다. 1907년 그는 오산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민족의 미래를 키우는 독립운동의 거점이었습니다. 오산학교는 근대적 교육과 민족정신을 함께 가르치는 곳으로, 이광수, 주요한, 함석헌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지식인을 배출했습니다. 이승훈은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이야말로 장기적으로 독립을 이루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교육 운동은 기독교와 교육 엘리트 중심에 머물렀다는 한계도 있습니다. 오산학교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운영되었고, 주로 지식인과 중산층 자제들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대중의 삶과 직접 맞닿는 교육 기회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습니다. 또한 비폭력과 도덕, 계몽에 기댄 전략이 식민 권력의 폭력성 앞에서 충분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됩니다. 무력 투쟁을 선택한 독립운동가들도 많았던 시기에, 이승훈의 교육 운동은 과연 가장 현실적인 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투쟁을 제약한 신념이었을까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이승훈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평안도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며 일제에 맞섰고, 이로 인해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후에도 그는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등에 참여하며 민족의 경제적·교육적 자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의 독립운동은 무력이 아닌 실력 양성과 계몽, 연대를 통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조만식 선생이 평가한 것처럼 "조선을 위하여 울고 웃고 조선을 위하여 죽은"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교육을 통한 독립은 어디까지 유효했는지, 장기적 전략이 단기적 저항보다 우선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승훈의 선택은 당시로서는 가능한 최선의 현실적 대안이었을 수 있지만, 동시에 일제의 탄압이 더 거세질수록 교육과 계몽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는 비판도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길러낸 청년들이 이후 독립운동과 건국, 근대화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점은 그의 교육 독립운동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활동 시기 내용 의의
오산학교 설립 1907년 근대 교육, 민족정신 교육 실력 양성의 거점
3·1운동 참여 1919년 민족대표 33인, 평안도 만세운동 주도 비폭력 독립운동
물산장려운동 1920년대 조선 물품 애용, 민족 자본 육성 경제적 자립
민립대학 설립운동 1920년대 민족 고등교육 기관 건립 시도 교육적 자립



남강 이승훈의 삶은 개인의 성공에서 민족의 미래로 시선을 전환한 위대한 전환의 역사입니다. 그는 고아에서 거상으로, 거상에서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 거듭났습니다. 그의 선택은 무력이 아닌 교육과 계몽, 경제적 자립을 통한 실력 양성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운동이 엘리트 중심이었고 비폭력 전략의 한계가 있었다는 비판도 존재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육을 통한 독립은 긴 시간이 걸리지만 가장 확실한 길이며, 그가 길러낸 인재들이 민족의 미래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그의 선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승훈의 삶은 변화와 도전, 의리와 상생, 그리고 민족을 향한 헌신으로 점철된 한국 근대사의 귀중한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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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튜브 강혜영의 역사이야기

https://www.youtube.com/watch?v=Fis7U6I8C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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