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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 여성 변호사 이태영(가족법 개정, 호주제 폐지, 여성 인권)

by gohappyjan 2026. 3. 3.

정의의 여신상
정의의 여신상

여성이 법을 전공한다는 게 말이 되냐는 소리를 들으며 변호사가 된 사람이 있을까요? 이태영 변호사는 1952년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었지만, 판사 임명은 "여자라서, 야당 정치인의 부인이라서" 거절당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법조인이 되는 것과 법조계에서 실질적 권한을 갖는 것이 얼마나 다른 문제인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선택한 길은 법정이 아닌 거리였고, 우는 여성들의 곁이었습니다.

새벽부터 몰려든 여성들, 변호사 사무실이 눈물바다가 된 이유

이태영 변호사가 자택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자 새벽부터 여성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안방, 건넌방, 마루방까지 여성들로 가득 찼고, 그들의 사연은 한결같이 남편의 폭력과 외도였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으며 1950년대 여성들에게 법률 상담소가 단순한 사무소가 아니라 유일한 생존 통로였음을 실감했습니다.

당시 여성들은 남편에게 쫓겨나도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했고, 이혼하면 친권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친권(親權, Parental Rights)이란 부모가 미성년 자녀를 보호하고 교육할 법적 권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당시 민법에서는 친권을 아버지에게만 인정했고, 어머니는 자녀를 키울 권리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출가한 딸은 상속에서도 배제되었고, 법은 여성을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이태영 변호사는 변호사 비용을 받기는커녕 상담을 해주고, 점심을 먹이고, 차비까지 쥐여 줘야 했습니다. 법률 사무소 운영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성법률상담소를 개설하고 무료 법률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법률 접근성(Legal Accessibility)이란 국민 누구나 법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뜻하는데, 당시 한국은 여성에게 이 접근성 자체가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주목한 건 이태영이 단순히 법률 지식을 제공한 게 아니라, 법률 상담소를 여성들이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법이 닿지 않는 곳에 법을 직접 가져간 실천이었습니다.

안 여인 간통 사건, 방청석을 가득 채운 여성들의 눈물

1950년대 후반, 이태영 변호사는 안 여인 간통 사건을 맡게 됩니다. 안 여인의 남편은 고위 공무원이었고, 외도를 일삼다가 오히려 아내에게 간통 혐의를 뒤집어씌워 이혼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남편은 30년 전부터 아이를 숨기고 결혼했고, 승진할 때마다 외도했으며, 외도로 낳은 딸을 부인 허락 없이 호적에 올렸습니다.

열 번이 넘는 공판마다 새벽부터 방청석은 여성들로 가득 찼습니다. 이태영이 변론할 때마다 방청석에서는 박수와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제 생각엔 이 장면이 단순한 재판 방청이 아니라,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법정에서 처음 들은 순간이었을 겁니다. 결국 안 여인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남편과 공모한 사람들이 거짓 증언을 인정했습니다.

이 사건은 전국적 이슈가 되었고, 이태영은 여성들의 법적 권리를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당시 여성들이 30년간 참고 산 이유는 법 때문이었습니다. 법이 여성을 보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 구제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태영은 이 사건을 계기로 법률 상담 자료를 축적하며 가족법 개정 운동의 근거를 만들어갔습니다.

가족법 개정과 호주제 폐지, 50년 투쟁의 기록

이태영 변호사는 1957년 민법안 중 친족·상속편 수정안을 제출했습니다. 처음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1958년 1차 가족법 개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처의 무능력제도 폐지: 기혼 여성도 법적으로 독립된 행위 능력을 인정
  • 부부재산 별산제 채택: 결혼 후에도 각자의 재산을 독립적으로 소유
  • 배우자 부정 쌍벌제 적용: 간통죄를 남녀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

여기서 무능력제도(無能力制度)란 특정 신분의 사람에게 법률 행위 능력을 제한하는 제도를 의미합니다. 당시 민법은 기혼 여성을 법적으로 "무능력자"로 규정해 재산 처분, 계약 체결 등을 독립적으로 할 수 없게 했습니다. 이 조항이 폐지되면서 여성도 법적 주체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1963년에는 가정법원이 설치되었고, 1977년에는 2차 가족법 개정이 이루어졌습니다. 부모가 친권을 공동으로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어머니와 장남의 상속 지분이 동등해졌습니다. 미혼 딸도 차남 이하 아들과 동등한 상속권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결혼한 딸에게는 여전히 상속권이 없었고, 동성동본 금혼은 한시적 허용에 그쳤습니다(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이태영은 "500년 묵은 인간 차별의 벽이 무너졌다. 여성이 새로운 것을 얻은 게 아니라 제자리를 찾았을 따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서 법 개정이 특혜가 아니라 복원이라는 인식을 읽었습니다.

1991년에는 3차 가족법 개정으로 양친족 범위가 남녀 평등해졌고, 이혼 시 재산분할 청구권이 확립되었습니다. 1997년에는 동성동본 금혼이 헌법 불합치 판결을 받았고, 이태영은 1998년 85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사망한 이듬해인 1999년부터 호주제 폐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2005년 호주제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나왔습니다. 2008년부터는 호주제가 완전히 폐지되고 가족관계등록제로 전환되었습니다(출처: 여성가족부).

백인여성회관 건립과 정치적 탄압, 그리고 남편 정일형

이태영은 무료 법률 상담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백인여성회관 건립을 추진했습니다. 후원자 한 명당 20만 원씩 모금해 1977년 건물을 완성했습니다. 여기서 백인(百人)이란 100명의 후원자를 의미하는데, 실제로는 국내외 후원을 통해 여성의 힘으로 회관을 세웠다는 상징성이 컸습니다.

하지만 1971년 이태영과 남편 정일형의 주택에 방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정일형은 야당 국회의원이자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선거운동 책임자였고, 이태영은 가족법 개정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조사 결과는 황당했습니다. "고양이가 불을 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대중 후보 관련 문서와 가족법 개정 자료가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법률 운동과 민주화 운동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그리고 정부가 그 연결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느꼈습니다.

1976년 명동성당 3·1 민주구국선언 이후 정일형은 국회의원직을, 이태영은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자격을 되찾았지만, 1980년 신군부 집권 후 김대중이 내란 음모로 재판받을 때 이태영은 증인으로 출석했습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던 자리에 그가 있었습니다.

1982년 남편 정일형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일형은 공개 석상에서 "제 재산 목록은 제 아내입니다"라고 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태영은 "당신은 천당에 가고 나는 지옥에 떨어지면 어떡하냐"라고 묻자, 정일형은 "이태영 없는 천당은 지옥이고, 이태영이 있는 지옥이 천당이오"라고 답했습니다. 저는 이 일화에서 법률 운동이 개인의 용기만이 아니라 관계의 지지로 가능했음을 봅니다.

이태영은 "나는 길이 없는 데로 다녔다. 그 길을 만들어 걸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삶은 법이 닿지 않는 곳에 법을 놓고, 법이 침묵시키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준 기록입니다. 호주제 폐지는 그가 죽은 뒤에야 완성되었지만, 그 길을 낸 사람은 분명 이태영이었습니다. 법은 사회를 바꾸는 도구일 수도, 억압의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태영의 삶에서 법을 어떻게 쓰느냐가 결국 누구의 편에 서느냐의 문제임을 배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5le8JNDOWJk&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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