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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밀정의 실체 (엄인섭, 이정, 내부분열)

by gohappyjan 2026. 3. 22.

의열단(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독립운동가의 최측근이 일본 밀정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이 질문을 처음 접했을 때 단순히 영화 속 설정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역사 기록을 살펴보니 이것이 현실이었고, 그 규모와 피해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의형제였던 엄인섭, 김좌진 장군의 비서였던 이정이 모두 밀정이었다는 사실은 독립운동이 얼마나 치열한 심리전 속에서 이루어졌는지 보여줍니다.

안중근 의형제 엄인섭의 배신

엄인섭은 안중근 의사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라고 직접 언급할 정도로 신뢰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의 핵심 인사였고, 홍범도 장군과도 각별한 사이를 유지했습니다. 여기서 '의형제'란 혈연관계가 아닌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이 형제의 의를 맺은 관계를 의미합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쉽게 말해 목숨을 함께 걸고 싸우겠다는 약속을 나눈 사이였던 겁니다.

그런 엄인섭이 1908년 11월 일본 영사관에 직접 찾아가 첩보원으로 고용해 달라고 청원했습니다. 일본 기밀문서에는 이 내용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그가 스스로 밀정이 되기를 자청했다는 점입니다. 강압이나 협박이 아니라 본인의 선택이었던 겁니다.

1919년 15만 원 탈취 의거는 엄인섭의 밀정 행각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철혈광복단은 조선은행 철도 부설 자금 15만 원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당시 소총 한 자루 가격이 30원이었으니, 5천 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50억 원에 달합니다.

문제는 이 돈을 무기로 바꾸는 과정이었습니다.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고, 임국정은 엄인섭을 믿을 만한 인물로 데려왔습니다. 엄인섭은 무기 구매 계획을 다 세워뒀다며 안심시켰지만, 다음 날 밤 일본 경찰이 난입했습니다. 윤준희(30세), 임국정(27세), 한상호(23세)가 체포되어 사형당했습니다. 러시아 지방관청 기록에는 "엄인섭은 도박과 카드놀이에 능한 사람이며 방탕하다"는 평가가 남아 있습니다(출처: 독립기념관). 그는 부인 외에도 여러 첩을 거느리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그 비용을 밀정 활동으로 충당했던 겁니다.

김좌진 장군 최측근 이정의 밀고

이정은 김좌진 장군의 막빈(幕賓), 즉 비서이자 참모였습니다. 여기서 막빈이란 조선시대부터 사용된 용어로, 장군이나 고위 관료의 측근에서 기밀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오늘날의 비서실장급 핵심 참모였던 겁니다. 1920년 청산리 대첩 직전 그가 작성한 진중일지는 북로군정서군의 내부 사정을 상세히 담고 있어 독립운동 연구의 중요한 1차 자료로 활용됩니다.

그런 이정이 청산리 전투 4년 후인 1924년 일본에 자수했습니다. 그가 제출한 밀정 보고서는 총 17장에 달했고, 김좌진 장군과 김원봉의 합동 의거 계획, 독립군 주요 인사들의 신상정보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보고서 내용을 보면서 배신의 깊이를 실감했습니다. 단순히 조직 위치만 알려준 게 아니라 동지들의 성격, 습관, 약점까지 상세히 적어낸 겁니다.

이정의 밀고로 군자금 책임자였던 이홍래와 강승경이 체포되어 각각 징역 10년, 1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들은 훗날 1995년과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사실은 최춘식과 이완이라는 인물도 이정의 밀고로 체포되었지만, 우리 역사에는 이름조차 남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일본 자료에만 "불령선인(불량한 조선인)"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밀정 이정의 위패는 국립현충원에 모셔져 있습니다. 그것도 그의 밀고로 체포된 이홍래의 위패 바로 옆에 나란히 있습니다. 1963년 국가는 이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습니다. 밀정 활동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지만, 한번 추서 된 훈장은 회수되지 않았습니다.

밀정이 만든 내부 분열과 의심

국사편찬위원회 발간 『한민족독립운동사』는 밀정 숫자를 약 4만 명 이상으로 추정합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2019년 KBS 시사기획창에서 5만 4천 건 이상의 문서를 해독한 결과 한국인 밀정 895명의 이름을 확인했습니다. 저는 이 숫자를 처음 접했을 때 단순히 많다는 생각만 했는데, 실제로 그들이 끼친 피해를 보니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밀정의 유형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생계형 밀정: 정보를 팔고 돈을 받는 유형
  • 탐욕형 밀정: 사치와 향락을 위해 동지를 파는 유형
  • 낙오형 밀정: 독립운동 중 좌절하여 전향한 유형
  • 강압형 밀정: 개인 약점이 잡히거나 고문을 견디지 못해 협력한 유형

1938년 남목정 사건은 밀정이 독립운동 진영에 어떤 균열을 만들었는지 보여줍니다. 조선혁명당 청년 이운한이 3당 통합 회의장에 난입해 총을 쐈고, 현익철이 사망하고 김구·유동열·지청천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심장 아래 총알이 박혔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오랫동안 이 사건은 독립운동 세력 간 내부 갈등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런데 2018년 새로운 연구 결과 일제가 내부 세력 대결을 이용해 치밀하게 공작을 펼친 사건임이 밝혀졌습니다.

임시정부도 밀정을 활용했습니다. 한도원은 일본의 밀정으로 포섭되었지만 실제로는 임시정부의 이중 첩자였습니다. 그는 일본에 거짓 정보를 흘리며 오히려 일본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당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는 "일본이 파견한 밀정 많지만 독립운동 단체가 만든 밀정 적지 않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밀정이 가장 큰 피해는 동지 간 의심과 불신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밀정으로 모함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백범 김구는 "나에게 한 발의 총알이 있다면 왜놈보다 나라와 민주주의를 배신한 매국노를 100번 천 번 먼저 처단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밀정 척결에 집중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의심되면 무조건 제거하는 극단적 상황이 이어졌고, 이는 독립운동 조직의 또 다른 상처가 되었습니다.

밀정의 존재는 독립운동이 단순히 총칼로 싸운 전쟁이 아니라 심리전이자 정보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역사를 정리하면서 배신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그리고 그 배신이 만든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새삼 느꼈습니다. 엄인섭과 이정 같은 인물들은 개인의 두려움과 욕망으로 공동체를 무너뜨렸고, 그 결과 수많은 동지가 죽음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단순히 배신자로 낙인찍는 것만으로 충분할까요, 아니면 그들을 밀정으로 만든 구조적 압박까지 함께 성찰해야 할까요. 역사는 빛나는 이름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어두운 이름들까지 정직하게 마주할 때 비로소 온전한 기억이 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Qw9kOP5ARcI&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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