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은 암흑의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 시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했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중에서도 의술과 독립운동을 함께 실천한 이태준 열사는 특별한 인물입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중심에 그의 기념관이 세워진 이유, 그리고 고향 경남 함안에도 기념관이 마련된 배경에는 한 인간의 숭고한 헌신이 있습니다. 이태준은 단순히 의사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과 나라를 살리는 일을 동시에 실천한 혁명가였습니다.
김필순과의 만남, 세브란스병원에서 시작된 운명
이태준은 1883년 경남 함안의 평범한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했지만 마을 서당에서 유교 윤리에 입각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일찍 장가를 가 두 딸을 두었지만,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부인을 잃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습니다. 이곳에서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김필순입니다. 김필순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김구 주석을 보필한 김규식의 처남이자, 삼일운동 때 2·8 독립선언을 국내로 전파한 핵심 인물의 친척이었습니다. 그는 세브란스병원의 의학생으로, 이태준이 일하던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김필순은 이태준의 성실함과 잠재력을 높이 평가해 세브란스병원 의학생이 되기를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이 제안이 구체화되기 전, 1907년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과 강제 퇴위라는 격동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군부대신 이병무는 고종을 퇴위시키고 정미조약을 체결한 뒤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습니다. 이에 반발한 박승환 대대장은 자책감에 권총으로 자살했고, 많은 군인들이 해산을 거부하며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이것이 남대문 전투였습니다. 부상당한 군인들을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기는 일에 이태준도 참여했고, 이 경험은 그에게 의술의 길을 선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세브란스병원 9회 졸업생이 되었고, 김필순과 함께 세브란스병원을 운영하던 의료 선교사 에비슨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에비슨은 카네기홀에서 "조선의 병원들은 그 어느 것도 병원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빈약하다"라고 호소했고, 이를 들은 세브란스가 당시 4만 5000달러(현재 약 65억 원)를 기부했습니다. 세브란스는 석유 산업으로 거부가 되었지만, 자신의 전 재산을 '누구나 갈 수 있는 학교, 병원, 교회'를 만드는 데 사용한 인물입니다. 이태준은 이런 정신이 깃든 병원에서 교육받았고, 왕부터 백정까지 누구나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 윤리를 체득했습니다. 개인의 안정을 포기하고 타지에서 싸움을 이어간 그의 태도는 분명 용기였습니다.
| 인물 | 역할 | 영향 |
|---|---|---|
| 김필순 | 세브란스병원 의학생, 독립운동가 | 이태준을 의학 및 독립운동의 길로 인도 |
| 에비슨 | 세브란스병원 운영 선교사 | 평등한 의료 윤리 교육 |
| 세브란스 | 미국 석유 사업가, 기부자 | 병원 설립 자금 지원 |
안창호 선생과 독립운동, 그리고 김규식과의 만남
이태준에게 또 다른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안창호 선생입니다. 1909년 안중근 의거 이후 배후로 지목된 안창호는 고문 끝에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고, 이때 이태준은 그를 치료하며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안창호는 이태준에게 청년학우회 가입을 권유했고, 회비 1원을 내주며 남산 씨에게 추천해 주었습니다. 청년학우회는 조선 지식인들이 모인 비밀결사 신민회의 자매 단체였습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본은 105인 사건을 조작해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빌미로 700명을 체포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신민회는 해체되었고, 김필순도 위험에 빠져 중국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이태준은 김필순을 배웅한 뒤 자신도 급히 중국 남경으로 망명했습니다. 남경은 신해혁명의 중심지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고 모인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어도 서툴고 연락처도 없던 이태준은 남경 기독의원에서 근무하며 막막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안창호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며 "중원 대륙의 혁명군이 이룩한 굉장한 일을 살피고 우리나라 정세를 생각해 보니 슬프고도 참담합니다. 우리는 어느 때 독립과 자유를 회복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니 막막합니다"라고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이때 그의 삶을 다시 바꾼 인물이 김규식입니다. 김규식은 상해 임시정부 부주석까지 역임한 인물로, 당시에는 젊은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는 이태준에게 몽골에 가서 비밀 군사학교를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몽골은 러시아와 중국에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입니다. 이태준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몽골로 떠났습니다. 비록 자금 부족과 몽골의 복잡한 정세로 군사학교는 설립하지 못했지만, 대신 '동의의 국'이라는 병원을 설립했습니다. 동의의 국은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의 병원'이라는 의미로, 독립운동가들의 기지국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적 전략과 연결되었는지는 기록의 공백이 많습니다. 비밀 활동의 특성상 성과와 한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렵고, 상징적 인물로 소비되는 과정에서 복잡한 맥락이 단순화되기도 합니다. 무장 투쟁과 외교 노선 사이에서 그의 역할이 어디에 더 무게를 두었는지에 대한 분석도 충분치 않습니다.
몽골에서의 의술과 독립 자금 전달, 그리고 김원봉 지원
1910년대 몽골은 중국 청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을 요구했지만 자치구로 전락한 상황이었습니다. 더욱이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드나들며 매춘 활동을 벌였고, 이로 인해 화류병이라 불리는 성병이 만연했습니다. 당시 몽골에는 10개가량의 병원이 있었지만, 대부분 러시아나 중국이 세운 군사 병원으로 상류층만 치료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몽골 백성들은 라마교나 무속에 의지할 뿐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이태준의 동의의 국은 남녀노소,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치료해 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병이 점차 근절되기 시작했고, 몽골 사람들은 이태준을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외모가 몽골인과 비슷했던 이태준은 러시아나 중국 의사들보다 친근하게 여겨졌고, 병원은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의 눈을 피해 쉬어가는 안전한 거점이 되었습니다. 이태준의 명성은 몽골 왕 보그드 칸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보그드 칸은 러시아 의사도 치료하지 못한 중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태준이 이를 치료해 냈습니다. 감동한 보그드 칸은 이태준을 어의로 임명했고, 외국인에게 수여할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인 '에르데니 넙치 오치르' 훈장을 하사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는 "몽골 사람들은 그를 석가여래 부처를 대하듯 존경한다"라고 보도했으며, 몽골인들은 그를 부처, 신, 하늘에서 보내준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하루에 수십 명, 많게는 50명이 동의의 국을 찾았고, 이곳은 독립운동가들의 든든한 후원처가 되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레닌은 한인사회당을 후원하며 상해 임시정부에 200만 루블의 독립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그중 40만 루블이 먼저 전달되었고, 이태준은 이 자금을 무사히 상해까지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이태준 동지에게 독립운동 자금 4만 루블을 주었는데, 그는 기적적으로 러시아군으로부터 자금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상해에서 이태준은 의열단 김원봉을 만났습니다. 김원봉은 일본을 상대로 활발한 의열 활동을 펼치기 위해서는 성능 좋은 폭약이 필요하다며, 폭약 전문가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태준은 의열단에 가입하겠다고 약속하고, 몽골로 돌아가 폭약 전문가를 찾아 김원봉에게 보냈습니다. 이 인물은 '마자르'라고 불렸으며, 한국독립운동사에 "헝가리인 협력자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마자르라고 불렀다는 것 외에는 정체가 확인이 힘든 인물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자르는 의열단을 도와 뛰어난 성능의 폭탄을 만들고 전달하며, 김성수의 종로경찰서 폭파를 비롯한 의열단 의거가 성공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 활동 | 내용 | 성과 |
|---|---|---|
| 동의의국 운영 | 몽골인 무상 치료, 독립운동가 거점 | 성병 근절, 왕실 어의 임명 |
| 독립 자금 전달 | 러시아로부터 40만 루블 상해 전달 | 임시정부 재정 지원 |
| 의열단 지원 | 폭약 전문가 '마자르' 소개 | 종로경찰서 폭파 등 의거 성공 |
이태준은 의료인으로서의 윤리와 혁명가로서의 결단을 어떻게 조율했을까요. 만약 그가 더 오래 활동했다면 몽골과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 지형은 달라졌을지 궁금해집니다. 개인의 희생은 어디까지 역사를 바꿀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희생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1920년 러시아 내전이 몽골까지 확대되자, 중국군이 철수하며 이태준에게 함께 떠나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이태준은 남은 독립 자금을 상해로 전달하고, 김원봉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몽골에 남았습니다. 얼마 후 백군 파벌인 운게른 슈테른베르크의 군대가 몽골에 들어왔고, '미친 남작'으로 불린 그는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이태준은 체포되어 1921년 38세의 나이로 희생되었습니다. 그가 죽은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립 자금 약탈, 볼셰비키 지지자 숙청, 또는 일본의 사주 등이 추측됩니다. 이태준이 희생된 후, 여운형 선생은 그의 무덤을 찾아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조선 사람 이태준의 무덤은, 이 땅의 독립을 위하여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 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이라고 추모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이태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했고, 몽골은 울란바토르 중심에 이태준 기념관을 세웠습니다. 이태준 열사는 의술과 독립운동이라는 두 길을 동시에 걸은 인물입니다. 몽골에서는 '몽골의 슈바이처'로, 우리 역사에서는 독립운동가로 기억됩니다. 그의 삶은 개인의 안정을 포기하고 타인과 나라를 위해 헌신한 선한 영향력의 본보기입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이 얼마나 구조적 변화를 이끌었는지, 그리고 그 침묵 속에 남은 질문들은 여전히 우리가 답해야 할 과제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까요. 이태준의 이름은 조용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이태준이 몽골에서 치료한 성병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나요?
A. 당시 몽골에서 만연했던 '화류병'은 매독을 비롯한 성병을 통칭하는 말이었습니다. 러시아, 중국, 일본 등지에서 온 사람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몽골 전역에 확산되었으며, 제대로 된 치료법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이태준은 근대 의학 지식과 약물 치료를 통해 이를 근절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Q. 이태준이 김규식에게 준 2,000원은 현재 가치로 얼마나 되나요?
A. 본문에 언급된 대로 당시 2,000원은 현재 가치로 약 2억 8000만 원에 해당합니다. 이는 김규식이 파리 강화회의에 가서 독립 청원 활동을 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이었습니다.
Q. 마자르라는 인물의 정체는 밝혀졌나요?
A. 아직까지 마자르의 정확한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한국독립운동사 기록에는 "헝가리인 협력자"로 추정되며, 이태준이 김원봉에게 소개한 폭약 전문가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본명, 국적, 이후 행적 등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Q. 이태준 기념관은 어디에 있으며 방문할 수 있나요?
A. 이태준 기념관은 몽골 울란바토르 중심부와 대한민국 경남 함안에 각각 설립되어 있습니다. 두 곳 모두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이태준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Q. 이태준은 왜 가족을 두고 망명했나요?
A. 이태준은 105인 사건으로 인해 급박하게 망명해야 했기 때문에, 어린 두 딸을 친가에 맡기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가족과 생이별하며 활동했으며, 이태준 역시 개인의 안전과 가족보다 나라의 독립을 우선시했습니다.
---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SYVmtQhaTg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