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박수근만큼 서민의 삶을 진솔하게 그려낸 화가는 드뭅니다. 강원도 양구 출신의 이 화가는 밀레의 만종을 보고 감명받아 평생 서민 화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빨래터의 여인, 잎 없는 나목, 화강암의 거친 질감이라는 세 가지 핵심 키워드가 담겨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박수근의 삶과 예술을 관통하는 이 세 가지 요소를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빨래터 여인에 담긴 선함의 미학
박수근 작품의 첫 번째 키워드는 '여인'입니다. 그의 그림 속 여인들은 단순히 개인의 초상이 아니라 시대를 살아낸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의 집단 초상입니다. 박수근은 빨래터에서 첫눈에 반한 김복순과 결혼하면서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지만 정신적으로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 드리겠다"라고 프러포즈했습니다. 부잣집 딸이었던 김복순은 "하루 세끼 죽 끓여 먹어도 좋으니 예수님 믿고 깨끗하게 사는 집으로 시집 가게 해달라"라고 기도했던 신앙심 깊은 여인이었습니다.
박수근의 부인 사랑은 각별했습니다. 평양 도청 근무 시절 매일 편지를 보내 우체부가 핀잔을 줄 정도였고, 출산 후 피 묻은 걸레도 직접 빨았으며, 아침마다 이불을 개고 빨래를 개어주는 등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남편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가족과 헤어졌다가 2년 만에 재회했을 때, 부인은 지뢰밭을 탱크 자국만 밟으며 월남하는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박수근에게 여인의 강인함과 지혜를 깊이 각인시켰습니다.
그의 그림 속 여인들은 표정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이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남편과 자식이 끌려간 뒤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모든 여인을 상징합니다. '빨래터', '노상', '기름장수', '아기 업은 소녀' 등의 작품에서 여인들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습니다. 박수근은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에게 여인은 고난 속에서도 선함을 잃지 않는 존재였으며, 이는 그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첫 번째 진실입니다.
나목에 투영된 화가의 진솔한 내면
박수근 작품의 두 번째 키워드는 '나목'입니다. 양구 공립보통학교 시절부터 그를 지켜본 나무는 평생의 모티프가 되었습니다. 그의 나목은 잎이 무성한 풍요로움과 거리가 멉니다. 한국전쟁 직후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던 시절, 그는 "마음 없는 붓을 들고 오늘도 오고 가고, 그림은 더디고 세월은 빠르거나, 못 오는 청춘이라 허하기 서러워라"라고 토로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도 나목처럼 묵묵히 버텼습니다.
박수근의 나목은 고목이 아닙니다. 겨울의 혹한을 견디며 봄을 기다리는 생명력의 상징입니다. '나무와 두 여인', '나목' 등의 작품에서 나무는 화면의 중심을 잡으며 여인과 아이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잎이 없어 쓸쓸해 보이지만 굵은 가지로 버티는 나무는 가난과 불인정 속에서도 예술혼을 지켜낸 박수근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작가 박완서는 미군 PX에서 박수근을 처음 만났을 때 그를 '간판장이'로 무시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박수근이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을 보여주자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박완서는 자신의 소설 '나목'에서 박수근을 모델로 한 인물을 통해 "그가 그린 나목을 볼 때마다, 그의 겨울은 나에게 살벌하게 추웠던 겨울나무가 그의 눈에는 어찌 그렇게 늠름하고 정겹게 비쳤을까"라고 표현했습니다. 박수근에게 나목은 죽어가는 고목이 아니라 봄을 준비하는 생명이었습니다. 추위를 유난히 싫어했던 그는 그럼에도 겨울 너머의 봄을 간절히 꿈꿨고, 이 진솔한 내면이 나목으로 형상화되었습니다.
화강암 질감에 새긴 영원한 아름다움
박수근 예술의 세 번째 키워드는 독특한 '질감'입니다. 양구 지역은 화강암과 그것이 풍화된 마사토가 풍부한 곳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돌과 함께 자란 박수근은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의 질감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호를 '석'이라 할 만큼 돌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이를 회화로 구현하기 위해 독창적인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박수근은 유화 물감을 10번에서 많게는 20번까지 덧칠하며 화강암의 거친 질감을 재현했습니다. 이 '마티에르' 기법은 그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옛 석물, 즉 석탑이나 석불 같은 데에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꼈다"라고 밝혔습니다.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돌의 항구성은 박수근이 추구한 예술의 본질이었습니다.
미국 대사관 근무자의 부인 마가렛 밀러 여사는 박수근의 열렬한 후원자였습니다. 그녀는 박수근의 작품을 다수 소장했으며 미국 전시회를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마가렛은 박수근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당신의 색상과 화풍을 변함없이 지속하라"라고 격려했습니다. 박수근은 "예술은 고양이 눈빛처럼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 깊게 한 세계를 깊게 파고드는 것"이라 믿었고, 화강암의 질감이야말로 그 신념의 구현이었습니다.
1957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세 여인'으로 낙선한 충격으로 술에 의지하다 백내장으로 한쪽 시력을 잃었지만, 1959년 추천 작가, 1962년 심사위원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1965년 51세로 생을 마감하며 개인전 한 번 열지 못한 채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너무 멀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사후 2007년 '빨래터'가 45억 2천만 원에 낙찰되며 그의 예술적 가치가 재평가되었고, 최근 삼성 이건희 컬렉션 중 18점이 양구 박수근미술관에 기증되었습니다.
박수근은 여인의 선함, 나목의 진실함, 화강암의 영원한 아름다움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한국 근대미술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가난의 미학'으로만 소비되는 점은 경계해야 합니다. 고단한 삶의 반복 재현이 사회구조에 대한 질문을 희미하게 만들고, 순박함과 소박함의 틀이 표현의 확장성을 제한한 것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합니다. 박수근은 서민을 위로한 화가였을까, 아니면 가난에 익숙해지게 만든 화가였을까. 그의 침묵하는 그림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출처]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M0fE4h1aJW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