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31일, 네 명의 탐험가가 블라디보스토크 앞바다에서 뗏목을 띄웠습니다. 그들이 타고 간 것은 12m 길이의 뗏목 '발해 1300호'였습니다. 발해가 세워진 지 1300년을 기념하며, 발해의 역사를 알리기 위한 항해였습니다. 그러나 23일 후 통신이 끊기고, 네 명 모두 동해 바다에서 희생되었습니다. 이들의 목숨을 건 도전은 단순한 모험이 아니라, 잊혀가는 우리 역사에 대한 절박한 외침이었습니다. 발해사 연구가 활발하지 못했던 1990년대 말, 이들은 왜 이토록 위험한 항해를 감행해야 했을까요?
발해 1300호 탐험대

발해 1300호 탐험대는 장철수 대장을 포함해 총 4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장철수 대장은 러시아를 전공한 독도 연구회 운영자로, 독도 전문가이자 독도 지킴이였습니다. 나머지 세 분은 탐험 전문가인 선장, 촬영 담당, 통신 담당으로 각자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이유는 이 지역이 발해의 동경(동쪽 수도)이 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발해 사람들은 동해 바다를 따라 일본과 무역했으며, 육로로 이곳까지 와서 바다를 통해 통일신라와도 교역했습니다.
탐험대는 발해인들이 교역하던 방식 그대로 무동력 항해를 선택했습니다. 순전히 바람의 힘과 해류의 힘만으로 동해 바다를 건너야 했습니다. 북서풍이 부는 겨울에 출발해 남동풍이 부는 여름에 돌아오는 발해의 항해 패턴을 재현하고자 했습니다. 초기 목적지는 제주도였으나 중간에 부산으로 변경되었습니다. 1월 5일 울릉도 인근에서 찍은 사진에는 혹독한 항해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울릉도에서 필요한 생필품을 지원받고 항해를 계속했지만, 해류가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았습니다.
동력이 없었기에 방향을 제어하기 어려웠고, 뗏목은 계속 일본 방향으로 휩쓸려갔습니다. 결국 23일, 항해에 나선 지 24일째 되는 날 통신이 끊겼습니다. 수색대가 출동했지만 뗏목만 부서진 채 발견되었고, 네 명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세 분의 시신은 찾았지만, 장철수 대장은 다리 한쪽만 발견되었습니다. 왜 이들은 이토록 무모해 보이는 행동을 해야 했을까요? 이들에게는 발해의 역사를 알리고자 했던 것이 목숨을 걸만큼 절박했던 것입니다.
장철수 대장은 통영 출신으로, 통영에서는 매년 추모제를 지내고 있으며 이분들을 기리는 조각상도 세워져 있습니다. 이들의 희생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발해 역사를 알리기 위한 목숨을 건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알리고자 했던 발해의 역사는 우리 역사에서 북쪽의 넓은 땅을 차지했던 마지막 역사이며, 앞으로 통일이 되고 간도 문제가 대두될 때 더욱 중요해질 역사입니다.
대조영과 발해 건국의 역사적 의미
발해를 세운 인물은 대조영입니다. 그런데 대조영의 아버지 이름이 대중상인데, 실제 이름은 걸중상입니다. 대조영이 발해를 세울 당시 당나라의 추격을 따돌리고 동모산에 수도를 정했는데, 이때 고구려 유민들만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말갈인들을 함께 데리고 발해를 세웠습니다.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던 사람이 대조영과 대중상 장군이었고, 말갈인들을 이끌던 리더가 걸사비우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걸중상이나 걸사비우나 비슷한 느낌의 이름인데, 이는 걸중상이란 이름이 말갈인의 이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구당서에는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별종이란 같은 계통에서 나왔다는 의미입니다.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해 고구려를 세웠을 때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 했고, 온조와 비류가 백제를 세웠을 때 "백제는 고구려의 별종"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대조영이 고구려의 별종이라는 말은 대조영이 고구려 계통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당서에는 "대조영은 본래 속말 말갈 사람으로서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기록인 삼국유사에는 "고구려의 옛 장수였던 조영이 성이 대씨인데 잔병들을 모아서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발해라고 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 장수, 즉 고구려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통일신라의 최치원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없앴는데 그 고구려가 지금 발해가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조영의 출신이 말갈인이냐 고구려인이냐는 논란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대조영 스스로가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선언했다는 점입니다.
일본에 남아 있는 발해 왕과 일본 왕이 주고받은 국서에서 발해 왕은 스스로를 "고려왕"이라고 칭했습니다. 우리 문헌에서 고구려와 고려는 같은 말입니다. 발해 왕이 스스로 고려 왕이라고 칭했다는 것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우리 역사라면, 고구려를 계승해서 세운 발해도 우리 역사인 것입니다. 대조영의 국가 정체성은 고구려인이었고, 그가 세운 발해는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국가였습니다.
간도 문제와 발해사의 중요성
장철수 대장이 독도 전문가로서 발해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간도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독도를 연구하다 보니 독도 말고도 영토 분쟁의 소지가 있는 곳이 간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도는 서간도와 동간도(북간도)로 나뉘는 굉장히 넓은 땅입니다. 이 간도 땅은 발해가 있었던 땅인데 지금은 중국 땅입니다. 우리가 통일이 되고 나면 간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고, 간도 땅을 잘 들여다보면 중국과 우리 사이에 영토 분쟁의 소지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되찾아올 수 있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간도 땅이 우리가 되찾아야 할 땅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간도 땅이 발해가 있었던 땅임을 먼저 알려야 합니다. 그래서 발해 역사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1997년 당시는 역사 연구가 아직 활발하지 못했고, 특히 고구려사나 발해사 연구가 활발할 수 없었습니다. 고대사는 발굴을 통해 많은 자료를 얻는데, 고구려도 발해도 우리 땅이 아니기 때문에 발굴이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주로 백제사나 신라사 중심으로 고대사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2000년 이후 중국이 동북공정을 주장하면서 고구려사를 중국의 당나라 지방 정권이라고 역사 왜곡을 하면서부터 고구려사 연구가 활발해졌고, 발해사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97년만 하더라도 고구려사는 물론 발해사는 더더욱 사람들이 잘 몰랐습니다. 발해는 200년이 좀 넘는 기간 동안 존속했지만, 거란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수도 전체가 완전히 불타버려 남겨진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발해사 연구가 상당히 진전되어 있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의 1.5배였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가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발해가 가장 넓었습니다. 통일신라가 지방행정을 9주로 나누었을 때, 발해는 62주로 지방행정 구역을 나누었습니다. 발해는 넓은 땅을 운영하기 위해 수도를 다섯 개, 전체를 15부로, 부 안에 62주를 두었습니다. 15부 안에는 용천부에 숙신족, 솔빈부에 솔빈족, 정리부에 읍루족 등 각각 다른 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는 발해가 다민족 국가였음을 보여줍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발해사를 중국의 역사로 왜곡시켰습니다. 말갈인들이 함께 세운 발해도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할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갈족은 고려 시대에 여진족으로, 조선 시대에 만주족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들이 청나라를 세웠습니다. 그 청나라는 지금 중국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 사람들이었다는 점과, 대조영 스스로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발해를 세웠다는 점입니다. 왕조 국가에서는 지배층이 상당히 중요하며, 발해 왕이 스스로를 고려왕이라 칭한 것은 발해의 정체성이 고구려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발해 1300호 탐험대의 희생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잊혀져가는 역사를 알리기 위한 절박한 외침이었습니다. 대조영은 고구려 멸망 후 흩어진 유민을 이끌고 발해를 세웠으며,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선언했습니다. 발해사는 단순한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간도 문제와 직결된 현재의 이슈입니다. 통일 이후 영토 분쟁에서 우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발해사 연구와 알림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장철수 대장과 탐험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알리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절박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발해의 역사를 기억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발해 1300호 탐험대는 왜 겨울에 항해를 시작했나요?
A. 발해인들이 실제로 일본과 무역할 때 사용했던 방식을 재현하기 위해서입니다. 북서풍이 부는 겨울에 출발해야 바람과 해류의 힘만으로 동해를 건널 수 있었고, 돌아올 때는 남동풍이 부는 여름을 이용했습니다. 무동력 항해를 통해 발해의 해상 교역 능력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Q. 대조영의 출신이 말갈인이면 발해가 우리 역사가 아닌가요?
A.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대조영 스스로가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선언했다는 점입니다. 발해 왕은 일본과의 국서에서 스스로를 '고려왕'이라 칭했으며, 지배층은 고구려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대조영의 국가 정체성은 고구려인이었고, 발해는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우리 역사입니다.
Q. 간도가 왜 영토 분쟁의 대상이 될 수 있나요?
A. 간도는 발해가 있었던 땅으로, 현재는 중국 땅이지만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이 통치했던 지역입니다. 통일 이후 간도 문제가 대두될 경우, 발해사가 우리 역사임을 입증하는 것이 영토 분쟁에서 우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근거가 됩니다. 발해의 영토가 고구려의 1.5배였고, 간도를 포함한 넓은 지역을 통치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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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ZIz4u_qgrhU&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