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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임시정부, 독립운동, 통일정부)

by gohappyjan 2026. 2. 12.

태극기
태극기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킨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임시정부의 문지기'라 칭하며 평생 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백범이라는 호에는 '백정과 같이 천하고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으며, 이는 가장 낮은 곳에서 국민에게 모범이 되고자 한 그의 철학을 보여줍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일본인을 처단하고 투옥되었으나 고종의 전화 한 통으로 목숨을 건졌고, 이후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며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습니다. 해방 후에는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1949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임시정부의 문지기, 백범 김구의 삶

 

김구 선생의 본명은 김창암이었으나 아홉 번이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중 '김창수'라는 이름은 인천감리서 투옥 시절에 사용했던 것으로, 영화 '대장 김창수'의 제목이 되기도 했습니다. 김구는 10대 후반 동학에 입문해 '애기접주'로 불릴 만큼 열성적으로 활동했으나, 동학농민운동이 일본에 의해 진압되면서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안중근 선생의 아버지인 안태훈의 집에 숨어 지내며 고능선 같은 유학자의 영향을 받았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소식을 듣고 일본인으로 의심되는 인물 쓰치다를 처단했습니다. 이로 인해 인천감리서에 수감되어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고종이 최초의 시외전화를 통해 사형집행 중지 명령을 내려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사건은 백범일지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만약 전화가 개통되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에서 김구라는 존재는 사라졌을 것입니다.

감옥에서 탈출한 후 김구는 안태훈의 영향으로 애국계몽운동에 눈을 뜨고 학교를 세워 교육 활동에 힘썼습니다. 3·1 만세운동 이후 상해로 건너가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습니다. 초대 대통령은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었으나, 그는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가 아닌 미국에 머물며 외교 활동에만 치중했고 국제연맹에 우리나라 통치를 맡기자는 주장까지 해 탄핵되었습니다. 이후 박은식, 이상룡, 양기탁, 안창호, 이동녕 등이 차례로 임시정부를 이끌었으나 모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이동녕의 부탁으로 김구가 임시정부를 맡게 되었습니다. 김구는 대통령제나 국무총리제 대신 국무위원제를 채택해 모두가 평등한 위치에서 임시정부를 꾸려가자고 제안했고, 이를 통해 1945년까지 임시정부를 지켜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임시정부를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뭅니다.

시기 사건 의미
1895년 쓰치다 처단 및 투옥 국모 복수, 고종의 전화로 생명 구함
1919년 임시정부 수립 독립운동의 구심점 마련
1930년대 한인애국단 조직 이봉창·윤봉길 의거 주도
1949년 안두희에 의한 암살 통일정부 수립 노력 중 비극적 최후


김구 선생이 스스로를 '임시정부의 문지기'라 부른 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의 호 '백범(白凡)'에서 백(白)은 '일백'이 아니라 '흰 백'으로 백정을 뜻하며, 범(凡)은 '평범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백범이란 '백정처럼 천하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자신조차 나라를 위하는 애국심을 가졌으니 다른 사람들은 더욱 강한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겸손과 헌신의 자세가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의 중심, 한인애국단과 젊은 영웅들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무장 독립투쟁을 전개했습니다. 1930년대 후반 창사에서는 배신자의 총격을 받아 네 발의 총탄을 맞고 생명이 위독한 상황에 처했으나, 중국 국민당 총통 장제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치료받아 기적적으로 회복했습니다. 병원에 한 달간 입원하는 동안 가족에게는 알리지 않았고, 회복 후 어머니 곽낙원 여사에게 사실을 말했을 때 어머니는 "동족에게 맞아 죽으면 말이 되는가, 일본 놈의 총에 맞아 죽어야지"라고 말했을 정도로 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했습니다.

곽낙원 여사는 임시정부 모든 이들의 어머니였습니다. 임시정부 사람들이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할 때는 중국 땅에서 쓰레기더미를 뒤져 버려진 채소를 주워다 죽을 쑤어 먹였습니다. 회갑을 맞았을 때 임시정부 사람들이 모은 돈으로 잔치를 준비하려 했으나, 곽낙원 여사는 그 돈으로 총 두 자루를 사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생일이 무슨 생일이냐, 이 총으로 왜놈들을 한 번이라도 더 죽여야 내 속이 편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김구는 사람들 앞에서는 제대로 울지도 못했지만, 홀로 '망자문(亡者文)'을 쓰며 깊은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곽낙원 여사의 동상은 초라한 차림에 손에 바구니를 든 모습으로 김구 선생 기념관에 세워져 있습니다.

김구 선생 곁에는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이 많았습니다. 의열단 단원이었던 나석주는 일본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했는데, 그는 김구 선생의 생일날 생일상을 차려주었습니다. 이후 김구 선생은 절대 생일을 챙기지 않았으며 "나석주가 차려준 그 생일상이 가장 감동적인 생일상이었고, 이보다 더 큰 생일상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도 김구 선생을 찾아와 자신의 목숨을 독립운동에 바치겠다고 자원했습니다. 특히 윤봉길 의사는 훙커우 공원 의거를 앞두고 김구 선생과 시계를 바꿔 찼는데, 자신의 시계는 6원짜리였고 김구 선생의 시계는 2원짜리였습니다. 김구 선생이 "내 시계를 왜 차느냐"라고 묻자 윤봉길 의사는 "제게 남은 시간은 불과 몇 시간밖에 없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처럼 젊은이들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김구 선생을 찾아와 목숨을 맡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김구 선생의 삶 하나하나에서 묻어나는 진정성과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김구 선생의 마음이 행동으로 일관되게 표현되었기에, 젊은이들은 기꺼이 그의 뜻에 따라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김구 선생의 도덕적 권위와 헌신은 단순한 구호가 아닌 삶 전체로 증명된 것이었습니다.


통일정부를 향한 꿈과 비극적 최후

 

1945년 해방 이후 김구 선생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한반도는 이념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김구 선생은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고 1948년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밝혔습니다. 그가 원했던 독립은 단순히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외세의 간섭 없이 하나의 정부를 세우는 완전한 독립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남북한 통일정부를 꾸리기 위해 북한 지도자들과 교섭했고, 이는 당시 정치 세력으로부터 오해와 비판을 샀습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은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암살의 배경에는 이념 갈등보다는 권력을 둘러싼 정치적 음모가 있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경교장 벽에는 지금도 총탄 자국이 남아 있으며, 암살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비통해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도 남아 있습니다. 당시 미국의 유명 시사잡지 '라이프(Life)'는 이 사건을 보도하며 "혼란 속에 한국 호랑이를 잃었다(Korea loses a tiger in turmoil)"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는 김구 선생이 국제적으로도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김구 선생은 수많은 어록을 남겼는데, 그중 "결국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남을 다스려야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보다, 모든 것은 내 자신을 다스리는 데 있다"는 말은 그의 철학을 잘 드러냅니다. 자신을 낮추고 절제하며, 솔선수범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철학을 평생 실천했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김구의 정치 노선이 항상 현실적이었는지는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경한 민족주의와 반공 입장은 해방 정국의 복잡한 국제 질서 속에서 협상 공간을 좁혔다는 평가도 존재합니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선택들이 구체적 제도 설계로 이어지지 못한 한계도 있었습니다. 이상은 분명했지만, 권력 구조를 장악할 현실 정치의 기반은 충분했는지 의문이 남습니다. 김구는 권력을 향한 정치가였을까, 아니면 이상을 지키려 한 사상가였을까? 만약 그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분단의 흐름은 달라졌을지, 혹은 국제 질서의 벽 앞에서 또 다른 타협을 해야 했을지 궁금해집니다.

그럼에도 김구의 도덕적 권위와 상징성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그는 임시정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낸 문지기였고, 독립과 통일이라는 대의를 향한 순수한 열망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그의 삶은 신념과 실천이 일치한 사례이며, 민족 자존을 지키려는 의지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이상과 현실의 간격이 얼마나 큰지, 신념은 어디까지 타협할 수 있으며 타협 없는 신념은 얼마나 지속 가능한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백범 김구는 독립이라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던 지도자였으며, 그의 유산은 오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임시정부 활동, 한인애국단 조직, 광복 이후 통일정부 수립 노력은 모두 신념과 실천이 일치한 삶의 증거입니다. 특히 "내가 원하는 나라는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라는 그의 이상은 무력과 권력보다 가치와 품격을 강조한 비전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김구의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지도자란 무엇인지, 신념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하게 만듭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김구 선생이 '백범'이라는 호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백범(白凡)의 백(白)은 백정을 뜻하고 범(凡)은 평범함을 의미합니다. 즉 '백정처럼 천하고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가장 낮은 위치에 두고 국민들이 자신보다 더 큰 애국심을 가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겸손과 헌신의 정신을 담은 호입니다.

Q. 김구 선생이 사형 집행을 면한 경위는 어떻게 되나요?
A. 1895년 명성황후 시해에 분노해 일본인 쓰치다를 처단한 김구는 인천감리서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종이 사형수 명단을 확인하던 중 신하의 건의로 김구의 행위가 국모 복수라는 점을 알게 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시외전화를 인천 교도소에 걸어 사형 집행을 중지시켰습니다. 이는 역사적 기적으로 평가됩니다.

Q. 임시정부가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A. 김구 선생이 국무위원제를 도입해 모두가 평등한 위치에서 임시정부를 운영하도록 했고, 스스로를 '임시정부의 문지기'로 낮추며 헌신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한인애국단의 활약, 곽낙원 여사 같은 헌신적 인물들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6년간 임시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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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8d6SqlO-C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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