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 의자왕은 삼천궁녀 설화로 유명하지만, 실제 역사적 인물상은 훨씬 복잡합니다. 해동의 증자로 칭송받았던 효성 깊은 태자가 어떻게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군주가 되었을까요? 그의 생애를 추적하면 개인의 자질보다 시대적 한계와 구조적 모순이 얽힌 비극이 드러납니다.
늦어진 태자 책봉과 의자왕의 절제된 삶
의자왕은 무왕의 첫아들로 추정되지만, 태자 책봉은 무왕 즉위 후 무려 33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의자왕 나이 30대 후반에야 태자가 되었고, 왕위에 오른 것은 40대 후반이었습니다. 이러한 늦은 책봉은 그에게 결격 사항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당시 무왕의 왕비는 사택적덕이라는 백제 유력 가문 출신이었는데, 의자왕은 이 왕비의 아들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화공주의 아들이거나 다른 귀족 출신 부인의 소생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왕비 소생이 아니라는 신분적 약점 때문에 의자왕은 태자 책봉 전까지 극도로 절제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삼국사기는 그를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으며 당시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라고 일컬었다"라고 기록합니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로 효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며, 특히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들과 우애 있게 지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의자왕이 이런 칭송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왕위 계승 경쟁 속에서 흠잡을 데 없는 품행을 유지하며 주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이름 '의자(義慈)'는 의로울 의(義)와 자애로울 자(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왕의 시호는 사후에 붙여지므로, 이는 그가 생전에 보여준 덕목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역설적으로 의자왕은 역대 백제 왕 중 실제 모습과 가장 다르게 왜곡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30대 후반까지 이어진 긴장과 절제의 시간은 그에게 깊은 심리적 압박을 주었을 것이며, 이는 후일 왕위에 오른 후 나타난 자만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위 초 신라 정복 전쟁과 백제의 부흥
힘겹게 태자 책봉을 받고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그는 즉위 초 신라를 맹렬히 공격하여 무려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라의 핵심 요충지였던 대야성을 함락시킨 일입니다. 대야성은 현재의 합천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청도를 거쳐 신라의 수도 경주까지 금방입니다. 백제 군사력이 신라 심장부까지 위협한 시기는 바로 의자왕 때였습니다.
백제의 군사적 성공은 신라를 극도의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당시 신라 진덕여왕은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며 친서를 썼는데, 거기에서 백제를 "대국(大國)"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피침략국인 신라가 백제를 대국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의자왕이 백제를 그만큼 강력하게 재건했음을 보여줍니다. 무왕 시대부터 시작된 백제 부흥의 노력이 의자왕 대에 이르러 가시적 성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양날의 검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자신을 억누르고 살아온 의자왕에게 군사적 승리는 긴장을 풀 수 있는 신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태자 시절 내내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던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을 검증받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큰 성과를 이룬 만큼 더 큰 자만에 빠지기 쉬운 조건이 만들어진 셈입니다. 백제 중흥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은 점차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 독선으로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자만과 간신, 그리고 충신을 외면한 결과
의자왕은 점차 옳은 소리를 하는 신하들을 멀리하고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간신들을 곁에 두기 시작했습니다. 백제에도 충신은 있었습니다. 삼충사로 기려지는 성충, 흥수, 계백이 대표적입니다. 성충은 의자왕에게 충언을 했다가 감옥에 갇혔고, 물 한 모금 주지 말라는 왕명에 따라 옥사했습니다. 흥수 역시 간언을 올렸다가 투옥되었습니다.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의자왕은 급히 흥수에게 대책을 물었습니다. 흥수는 바다로 들어오는 군대는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막고, 육지로 오는 군대는 탄현(지금의 충주 지역)에서 막아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이는 성충이 옥중에서 죽어가며 남긴 유언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간신들은 "두 사람이 백제에 원한을 품고 오히려 몰락의 길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왕을 설득했습니다. 의자왕은 간신의 말을 믿고 기벌포와 탄현을 포기한 채 사비성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계백 장군이 사비성 함락 직전까지 결사 항전했지만 결국 패했고, 사비성도 함락되었습니다. 의자왕은 더 안전한 요새인 웅진성으로 피신했지만, 믿었던 웅진성 성주가 그를 당나라에 넘겨버렸습니다. 간신을 믿다가 간신의 손에 왕도 몰락하고 백제도 멸망한 것입니다. 인디언 속담에 "사람의 입이 하나이고 닫혀 있는 것은 말을 삼가라는 뜻이고, 귀가 두 개 있고 열려 있는 것은 양쪽으로 들으라는 뜻"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의자왕은 한쪽 귀만 열어놓았던 셈입니다.
의자왕을 단순히 무능한 폭군으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구조적 붕괴 속에서 끝내 버티지 못한 군주였습니다. 당과 신라의 연합이라는 국제 질서 변화를 과소평가한 것은 결정적 한계였지만, 귀족 세력 통제 실패와 내부 분열은 그 개인만의 책임으로 돌리기 어려운 백제 말기의 시대적 가혹함이었습니다. 백제의 700년 역사는 우리에게 개방적 사고로 배우되 자만에 빠지지 말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는 힘을 가지라는 교훈을 남깁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EBJX0U63T_Q&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