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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류성룡의 임진왜란 활약 (임진왜란 대비, 인재 발탁, 국가 위기 관리)

by gohappyjan 2026. 1. 29.

서애 류성룡
서애 류성룡

 

조선 역사상 가장 큰 전란이었던 임진왜란. 이 국가적 재난 속에서 류성룡은 좌의정 겸 병조판서 도체찰사로서 전쟁을 지휘했습니다. 그는 이순신과 권율을 발탁하고, 명나라와의 외교를 주도하며, 선조의 무책임한 몽진 속에서도 조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리더십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합니다. 전쟁 이전의 준비는 충분했는지, 붕당정치 속에서 개혁을 밀어붙이지 못한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 류성룡의 전쟁 대비와 한계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전쟁의 가능성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1590년 조선통신사 파견 논란이 있었을 때, 그는 일본이 정말 전쟁을 일으킬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며 통신사 파견을 주장했습니다. 통신사로 갔던 정사 황윤길은 "왜적은 반드시 침범할 것이오니 대비책을 마련하심이 옳을 듯합니다"라고 보고했으나, 부사 김성일은 "전하 일본에서 그런 정황을 보지 못했으니 걱정할 일이 아니라 사료되옵니다"라고 상반된 의견을 냈습니다.
황윤길은 서인이었고 김성일은 동인이었기에 붕당정치의 대립이 정확한 정세 판단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동인이었던 김성일을 불러 류성룡이 직접 확인했을 때, 김성일은 "왜인들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제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황윤길의 말은 너무 지나쳐서 안팎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미혹시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의 의욕을 풀어 주려 했습니다"라고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이를 통해 류성룡은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분명히 인식하게 됩니다.
류성룡은 조선의 군사 체제인 제승방략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제승방략 체제는 외적이 침입하면 각 지역 군현의 군사들이 한 곳으로 집결하고 중앙에서 사령관을 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군사가 집결하고 사령관이 파견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일본의 빠른 진격 속도에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류성룡은 조선 초기의 진관 체제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반대 세력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류성룡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그는 전쟁의 가능성을 예견하고 제도의 문제점을 인식했지만, 붕당정치의 갈등 속에서 근본적인 개혁을 밀어붙이지 못했습니다. 율곡 이이는 임진왜란 8년 전에 "나라의 형편이 고칠 수 없는 썩은 집과 같다. 1년을 버틸 양식도 없고 모든 것이 최악의 상황이다"라고 경고했습니다. 류성룡도 이러한 위기를 알고 있었지만, 정치적 현실 속에서 개혁의 속도는 전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신중함이 책임감이었는지, 아니면 결단을 미룬 한계였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인재 발탁을 통한 전쟁 대비, 이순신과 권율의 등용


류성룡의 가장 빛나는 업적 중 하나는 바로 인재 발탁입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전라좌수사로 이순신 장군을, 경상우수사로 원균을, 그리고 의주목사로 권율 장군을 임명했습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의 발탁은 파격적이었습니다. 이순신은 당시 종 6품 정읍현감이었는데, 전라좌수사 정 3품까지 무려 일곱 단계나 승진한 사례였습니다. 반대하는 인물들도 많았지만 류성룡의 천거를 믿고 선조가 승진을 밀어붙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후, 류성룡은 그에게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선물했습니다. 이 책은 병법과 관련된 전문서적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훗날 『난중일기』에 "좌의정 류성룡이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그것을 보니 수륙전에서의 화공 등에 관한 것을 일일이 설명하고 있는데 참으로 만고의 보기 드문 책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류성룡은 단순히 인재를 발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지식과 전략까지 공유했던 것입니다.
이는 류성룡이 문무에 모두 능통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렸고, 21살에 퇴계 이황 선생을 만나 "서애는 하늘이 낸 인물이다. 장차 나라의 기둥이 되어 큰 일을 할 것이다"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같은 문하에서 수학했던 김성일조차 "스승님께서 제자를 칭찬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류성룡만은 스승님께서 칭찬을 하지 않으셨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25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28살에는 성절사로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학자들로부터 서애 선생이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류성룡의 인재 발탁은 단순히 능력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을 넘어, 국가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었습니다. 이순신과 권율은 이후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인재를 발탁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을까?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더 많은 준비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류성룡의 신중함이 때로는 적극적인 개혁을 가로막은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물음은 그의 리더십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필요한 과정입니다.


국가 위기 속 류성룡의 리더십, 선조의 몽진과 전쟁 지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51세였던 류성룡은 좌의정 겸 병조판서 도체찰사까지 책임을 맡게 됩니다. 일본은 부산을 점령한 후 서울을 향해 파죽지세로 올라왔습니다. 상주를 막고 있던 이일 장군은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크게 패퇴했고, 선조가 가장 믿었던 신립 장군 역시 충주에서 크게 패하고 전사했습니다. 충주까지 뚫리자 선조는 북쪽으로 몽진을 가기로 하고 류성룡에게 도성을 지키도록 명했습니다.
하지만 이항복이 "지금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명민하고 민첩하여 사무에 숙달하고 외교에 능한 사람은 류성룡 한 사람뿐입니다"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류성룡은 선조의 몽진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선조는 임진강을 건널 때 배가 필요했고, 주변 민가를 뜯어서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 배로 강을 건넌 후 선조는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도 철거시켰습니다. 적병이 그것을 뗏목으로 이용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지만, 이로 인해 백성들 역시 임진강을 건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비정한 군주였습니다.
평양성에 도착한 선조는 "죽음으로써 이 평양성을 지키겠다"라고 선언했고, 성 밖에 있던 백성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선조는 그 백성들을 뒤로하고 다시 도망치듯 북쪽으로 몽진을 떠났습니다. 결국 평양성은 일본의 수중에 떨어졌고, 백성들은 "이미 성을 버리려고 했으면서 왜 우리를 속여 성에 들어오도록 하여 적의 먹이가 되게 하는가"라며 분노했습니다. 임금이 저버린 백성들은 곳곳에서 민란을 일으켰습니다.
몽진을 떠나던 선조는 "내가 천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라며 여차하면 명나라로 건너가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류성룡이 막아섰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의주를 떠나 압록강을 넘는 즉시 이 전쟁은 조선과 왜의 싸움이 아닌 명과 왜의 전쟁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조선은 이 전쟁에서 단 하나의 주장도 펼칠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리고 조선은 더 이상 전하의 땅이 아니게 되옵니다. 만약 이 사실을 백성들이 알게 되면 사기는 땅에 떨어져 의병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병사들 또한 창을 잡을 힘이 없게 됩니다. 전쟁에서 지는 것입니다."
눈물로 호소하는 류성룡의 주장에 선조는 뜻을 되돌렸습니다. 류성룡은 명나라가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은 것이 아닌지 의심했을 때도 평양성 높은 곳으로 가서 일본이 침략해 온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명나라도 의심을 거두고 이여송이 이끄는 4만여 명의 원군을 파병했습니다.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했고, 이는 전세를 역전시키는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류성룡은 평양의 지도를 꺼내 놓고 어떤 곳을 공격해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했고, 이여송은 류성룡이 가르치는 곳마다 붉은 글씨로 표시하며 귀담아들었습니다.
그러나 평양성 전투의 승리를 두고 조선의 많은 대신들, 특히 이항복은 "평양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여송 제독의 공"이라며 생사당을 짓자고 제안했습니다. 사당은 보통 돌아가신 분을 위해 짓는 것인데, 살아 있는 이여송을 위해 생사당을 짓자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은 명의 원군에 감격하면서 명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습니다. 류성룡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국가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패전과 혼란의 책임을 개인의 도덕성으로만 환원하는 서술은 구조적 문제를 흐릴 위험이 있습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은 관료였습니다. 이순신과 권율을 발탁하고 전쟁의 실상을 기록한 『징비록』은 반성과 경계의 정신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전쟁 이전 대비가 충분했는지, 붕당정치 속에서 근본적 개혁을 밀어붙이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서애 류성룡의 임진왜란 속 리더십을 조목조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유튜브 : https://www.youtube.com/watch?v=gXzvO-Rxkrs&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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