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류성룡은 뛰어난 지략과 과감한 개혁, 그리고 탁월한 인재 등용으로 조선을 구해낸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은 성찰과 결단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했습니다. 전쟁 이후 남긴 징비록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책임을 끝까지 다하려는 한 리더의 치열한 반성문이었습니다. 과연 류성룡의 신중함은 책임감이었을까요, 아니면 결단을 미룬 선택이었을까요?
위기 속에서 빛난 지략과 개혁
류성룡 선생의 첫 번째 리더십은 지략입니다. 그는 이순신 장군에게 증손 전수방약이라는 병법서를 선물했고, 이순신은 이를 "만고의 보기 드문 책"이라 극찬했습니다.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가 승리를 거둔 것도 류성룡의 결정적인 영향 덕분이었습니다. 명나라 군대가 임진강을 건너지 못해 남하를 거부하자, 류성룡은 우리나라에 널린 칡을 꼬아 단단한 동아줄을 만들고 그 사이에 나무를 비틀어 꽂아 부교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기지를 발휘해 명나라 군대를 남쪽으로 진격하게 만든 것 역시 류성룡이었습니다.
그의 두 번째 리더십은 개혁입니다. 명나라가 일본과 비밀리에 강화를 추진하고 더 이상 전쟁을 할 의사가 없자, 류성룡은 독자적으로 일본에 맞서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압수레가 부서진 줄 알면서도 바퀴를 고칠 줄 모른다면 뒤집히고 부서진다"며 필요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일본의 조총부대에 맞서기 위해 훈련도감을 편성했고, 조총을 쓰는 군사, 창이나 칼을 쓰는 군사, 활을 쏘는 군사로 구성된 삼수병 체제를 갖췄습니다. 또한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로 군사를 모집하고 직업 군인으로 봉급을 지급하는 혁신적인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면천법을 통해 왜를 잡아오거나 공이 있으면 벼슬을 주고, 특히 천민의 경우에는 신분 상승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런 면천법 덕분에 천민들이 의병에 많이 합세하게 되었습니다. 천민들과 양반들은 군역을 질 의무가 없었지만, 속오군을 편성해서 양반도 병역의 의무를 지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한 세제 개혁도 단행했습니다. 공물을 현물이 아닌 쌀로 내도록 하는 대동법의 전신인 작미법을 시행했고, 토지의 양에 따라 차등 있게 내게 했습니다. 이 작미법은 전란이 끝나고 없어졌다가 후에 대동법으로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나라 밖으로는 중국과 금지되어 있던 사무역을 일부 허용했고, 당시 중국 사람들이 조선의 무명에 열광했던 점을 활용해 많은 물자를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류성룡의 이런 개혁들은 위기가 닥친 후에야 단행되었습니다. 붕당 정치와 제도적 결함을 인식하고도 선제적 개혁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했다는 점은 그의 신중함이 강점이자 한계였음을 보여줍니다. 위기 이전의 대비 부족은 결과적으로 국가에 큰 대가를 남겼습니다. 류성룡의 개혁은 분명 효과적이었지만, 만약 전쟁 이전에 이런 개혁들이 추진되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인재를 알아본 혜안과 용서의 리더십
류성룡의 세 번째 리더십은 혜안입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을 천거했습니다. 당시 이순신은 조정에서 그를 추천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무과에 오른 지 10년이 되도록 승진되지 않았고, 비로소 정읍 현감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높은 벼슬도 거치지 않았고 전라좌수사를 맡을 정도로 경력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성룡은 이순신 장군을 알아보고 추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 통신사로 다녀왔던 김성일도 재평가했습니다. 김성일은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가 결국 귀향 보내졌습니다. 그런데 류성룡은 김성일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을 보았습니다. "전하의 뜻을 잘 받들어 초유사의 업무를 잘 수행할 것입니다. 또한 다시 한번 반성의 기회를 준다면 김성일은 분명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할 것입니다." 이렇게 선조를 설득해서 유배 보내졌던 김성일을 다시 불러 경상도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구황의 특사 초유사로 파견했습니다. 실제로 김성일은 경상도 지역 민심을 다독이고 경상도 지역에서 많은 의병이 일어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화약 제조 기술자도 필요했습니다. 일본의 편에 섰다고 감옥에 갇혀 곧 사형 집행이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이 대풍손을 설득해서 그에게 화약 제조를 맡겼습니다. 이 대풍손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엄청난 화약을 제조해서 화약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선조에 대한 원망이 컸습니다. "나를 어루만져 주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니 누구를 섬긴 들 임금이 아니겠느냐"라고 하며 많은 백성들이 일본의 첩자가 되거나 일본의 편에 섰습니다. 류성룡은 일본의 첩자가 되었다가 반성하는 백성들, 혹은 밀란을 일으켰다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백성들을 모두 용서해 주고 군량미를 보급하는 등 중요한 역할들을 맡겼습니다.
이처럼 류성룡은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뿐 아니라, 과거의 실수를 용서하고 기회를 주는 포용력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 중심의 리더십 방식은 제도적 개선보다 인물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능력과 성찰로 해결하려는 접근은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이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제도적 취약성을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못했습니다. 류성룡이 인재를 등용하고 용서하는 리더십을 보인 것은 분명 훌륭하지만, 그러한 인재들이 제대로 활약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더 강력하게 마련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징비록에 담긴 책임의 무게와 성찰
류성룡의 네 번째 리더십은 결단력입니다. 대명국으로 뛰어들어가 귀국, 즉 조선이 선구가 되어 정명가도, 명을 정벌하는 데 조선이 함께 하자는 이 국서를 명나라에 보내지 말자고 반대하는 동인들 틈에서, 같은 동인이었지만 류성룡은 명에 알려야 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했습니다. 그러한 솔직한 그의 외교가 실제로 명과 조선 사이에 얽힌 문제들을 푸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명나라에서 원군을 이끌고 온 이여송은 굉장히 무례했지만, 류성룡은 그런 명나라 장수들을 상대로 유연하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외교를 수행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류성룡에게 맡은 역할이 막중하고 많은 책임이 주어지다 보니 그를 시기하고 반대하는 세력들도 많았습니다. 여러 차례 탄핵을 당하기도 했고, 그럴 때면 거침없이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자리를 내어놓는 결단력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598년, 류성룡은 반대 세력에게 탄핵되었습니다. 탄핵의 명분은 주화국의 죄인이다, 즉 일본과 강화를 주장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가 사직 상소를 올리자 선조는 그를 파직했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그날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었습니다.
류성룡의 대통력, 지금의 다이어리에는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에서의 죽음을 이렇게 적으며 애통해하고 있습니다. "전투하는 날에 직접 화살과 돌을 무릅쓰자 부장들이 간언하여 만류하며 대장께서 스스로 가벼이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듣지 않고 직접 출전해 전쟁을 독려하다가 이윽고 날아온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이순신 장군의 전사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면서 이런 시를 짓기도 했습니다. "백전노장 이장군은 한 손으로 하늘 절반을 지탱했네. 맹렬한 불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외적의 마음을 다 태웠네. 공은 컸지만 모함과 시세의 틀을 피하지 못하여 목숨을 깃털처럼 여겼으니 무엇이 아까웠으리."
파직된 류성룡은 안동으로 돌아와 오연정사에서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징비록을 집필했던 것입니다. 징비록의 서문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와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나라의 중책을 맡아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어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비록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마는 그래도 훗날의 경계가 되겠다." 류성룡은 7년의 전란을 극복하고 그걸로 끝이 아니라 그 전란을 잊지 않도록 후세에 경계하기 위해서 징비록을 저술했습니다.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대비했던 것입니다.
징비록은 방대한 기록입니다. 그 속에는 당시 조정의 상황들이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류성룡이 누구보다 중요한 위치에서 모든 상황들을 다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중요한 기밀문서들에 대한 정보까지도 모두 징비록에 담고 있습니다. 당시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설명도 담고 있고, 명나라와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 대해서도 모두 저술되어 있으며, 그 당시 백성들이 겪어야 됐던 고통의 참상도 다 기록해 두었습니다.
류성룡의 리더십은 위기 앞에서 책임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감을 줍니다. 임진왜란 중 인재를 알아보고 이순신을 중용한 결단, 전쟁의 실패를 기록해 후대에 경계로 남긴 태도는 성찰적 리더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은 신중함이 강점이자 한계였습니다. 붕당 정치와 제도적 결함을 인식하고도 선제적 개혁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했고, 위기 이전의 대비 부족은 결과적으로 국가에 큰 대가를 남겼습니다. 또한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방식은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성찰로 환원하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류성룡의 신중한 판단은 책임감이었을까, 아니면 결단을 미룬 선택이었을까. 위기에서 필요한 리더십은 성찰과 결단 중 어디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하는지 그의 사례는 여전히 의문을 던집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MrTRAhjAYjU&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