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석굴암의 과학 (인공석굴, 일제보수, 그랭이공법)

by gohappyjan 2026. 2. 22.

석굴암 내부 전경
석굴암 내부 전경

 

통일신라 시대 토함산 중턱에 세워진 석굴암은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인도와 중국의 석굴 사원 전통을 받아들이되, 화강암이라는 단단한 돌을 깎아 인공적으로 석굴을 조성한 독창적 건축입니다. 본존불을 중심으로 배치된 조각들은 정교한 수학적 비례와 과학적 원리를 담고 있으며, 자연 환기와 습도 조절이 가능한 구조로 설계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잘못된 보수 공사로 인해 석굴암은 원래의 자정 능력을 상실했고, 현재는 인공 설비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석굴암에 담긴 과학적 원리와 역사적 변천, 그리고 우리 건축 문화의 지혜를 살펴봅니다.

인공석굴 사원의 탄생과 수학적 설계

석굴암이 위치한 토함산은 안개와 구름을 토한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으로, 포항 너머 동해바다의 습한 수증기가 많이 유입되는 지역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석굴 사원을 만든 것은 인도의 아잔타 석굴 사원과 중국의 둔황 석굴, 윈강 석굴 등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더운 날씨 속에서 시원하게 기도하기 위해 굴을 파서 부처님을 모셨고, 굴 안은 항상 10도 정도의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었습니다. 중국도 이러한 전통을 받아들여 다양한 석굴 사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돌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너무 단단해서 굴을 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통일신라의 장인들은 돌을 깎아 인공적으로 석굴을 만드는 방법을 선택했고, 이것이 바로 석불사, 즉 석굴암입니다. 석굴암 내부의 본존불은 가장 아름다운 균형미를 자랑하는 불상으로, 얼굴의 너비를 1로 보면 가슴은 2, 어깨는 3, 가부좌를 틀고 있는 무릎까지는 4라는 비율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1:2:3:4의 비율은 수학적 조화를 통해 시각적 안정감을 주는 설계입니다. 본존불 뒤편에는 관음보살상과 부처님의 10대 제자 조각상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위쪽에는 감실이 있어 많은 보살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다만 일제강점기 때 그중 2개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석굴암의 또 다른 과학적 특징은 본존불 뒤 벽면에 광배가 부조로 새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보는 위치에 따라 광배의 위치가 달라지게 되는데, 기도실 전실에서 성인의 키 높이로 바라봤을 때 본존불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면서 머리 뒤에 광배가 정확히 비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인간의 키에 맞춘 인간 중심의 건축 설계라는 점에서 석굴암은 단순한 종교 건축을 넘어 인본주의적 공간 구성의 걸작입니다.

비율 구분 본존불 신체 부위 비율 값
기준 얼굴 너비 1
2배 가슴 너비 2
3배 어깨 너비 3
4배 가부좌 무릎까지 4

이러한 수학적 비례와 인간 중심의 설계는 석굴암이 단순히 종교적 예배 공간을 넘어 예술적·과학적 완성도를 추구한 건축물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공간은 국가 권력의 후원 아래 조성되었으며, 신앙의 표현이자 동시에 통치 이념을 정당화하는 상징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장엄한 본존불의 평온한 미소 뒤에는 당시 사회의 자원과 노동력이 집중 투입되었고, 그 과정에서 발생했을 사회적 긴장과 희생은 오늘날 충분히 조명되고 있지 않습니다.

돔 구조의 과학과 일제 보수의 치명적 오류

석굴암의 가장 놀라운 과학적 특징은 화강암을 둥근 돔 모양으로 쌓아 올린 구조입니다. 돌을 둥글게 쌓는 것은 중력 때문에 매우 어려운 작업입니다. 돌은 아래쪽으로 떨어지려는 힘을 받기 때문에 무게 중심을 정교하게 맞추어 서로 힘이 상쇄될 수 있도록 쌓아야 합니다. 석굴암의 장인들은 돌을 쌓아 올리면서 중간중간 감잡이돌이라는 것을 끼워 넣었습니다. 이 감잡이돌은 바깥쪽이 더 돌출되어 있어 그 무게로 지렛대 역할을 하여 힘을 반대쪽으로 끌어들입니다. 이로 인해 돌들이 단단히 고정되며, 지금까지도 이 인공 석굴의 지붕이 무너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제일 윗부분에는 무게가 무려 20톤에 달하는 덮개돌을 올렸습니다. 이 덮개돌은 돌들을 더욱 단단하게 보정시키면서 동시에 돔 전체의 무게를 감당하는 핵심 구조입니다. 이렇게 정교하게 설계된 석굴암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사람들에게 잊혔고, 높은 토함산 중턱에 위치한 탓에 더욱 외면받았습니다. 그러다 1909년 우편배달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석굴암의 발견 소식에 당시 통감부의 일본인들은 크게 상기되었고, 심지어 석굴암을 서울로 옮기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발견 당시 석굴암은 많은 석축이 무너진 채였고, 천정 앞부분도 무너져 있었습니다. 일본 전문가는 처음 석굴암을 보고 "동양무비", 즉 동양에서 비할 바가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극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의한 보수 작업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일본은 무너진 천정 돌을 끼워 맞추면서 공간을 조금 남겨두고 그 위에 시멘트로 지붕을 고정시켰습니다. 당시 시멘트는 새로운 건축 자재로 각광받았고, 일본은 천정을 더 잘 고정시키기 위해 2미터 두께로 시멘트를 지붕에 발랐습니다. 또한 바닥에 흐르는 차가운 지하수를 막기 위해 습기 방지 목적으로 바닥을 메워버렸습니다. 일본의 보수가 끝난 지 1년이 지나자 석굴암 안에 습기가 생기기 시작했고, 이끼가 끼기 시작했습니다. 시멘트에서 나온 탄산가스와 화학물질이 화강암을 상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원래 석굴암은 돌로 지붕을 만들고 그 위에 작은 자갈을 덮고 다시 흙을 덮었습니다. 자갈과 흙 사이로 공기가 통하게 되고, 공기가 머금은 습기는 자갈이 흡수하여 건조한 공기만 석굴암 내부로 들어오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비가 많이 오거나 습기가 많을 경우, 석굴암 바닥에 흐르는 차가운 지하수로 인해 습한 공기는 아래로 내려가고 수증기는 바닥으로 스며들어 석굴암 내부의 습도와 통풍이 자연적으로 조절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잘못된 보수 공사로 석굴암은 그 자정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현대에 와서 우리는 다시 보수를 시도했지만, 이미 발라놓은 시멘트를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한 번 더 시멘트를 바르고 흙을 덮어 현재의 모습을 만들었으며, 앞에 전각을 세워 통유리로 석굴암을 가두고 내부에서 기계를 통해 습기를 제거하고 있습니다. 1200년 동안 잘 보존되어 오던 석굴암이 20세기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한 것입니다. 이는 복원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심각한 파괴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석굴암은 통일신라의 본래 모습인가, 아니면 일제 보수와 현대 기술이 재구성한 결과물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구분 원래 석굴암 구조 일제 보수 후
지붕 재료 돌 + 자갈 + 흙 시멘트 2m 두께
통풍 시스템 자갈층 통한 자연 통풍 차단됨
습도 조절 지하수 + 자갈층 흡수 바닥 메워짐 + 인공 설비
보존 상태 1200년간 자연 유지 1년 만에 이끼 발생

남한산성과 그랭이 공법의 철학

석굴암 외에도 우리 민족은 돌을 다루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불국사의 석축과 남한산성의 성벽 등은 예술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사상적 가치, 수학적·과학적 특징까지 담아낸 건축물입니다. 특히 남한산성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천작지성(하늘이 만들어 준 성)이라 불릴 만큼 자연 지형을 활용한 뛰어난 요새입니다. 해발 480m에 위치하고 둘레가 8km에 달하는 남한산성은 통일신라 시대 문무왕 12년에 쌓았던 주장성의 흔적 위에 조선시대 인조 때 다시 축조된 성입니다. 남한산성에는 성벽 쌓기 기술의 변천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단단한 화강암을 멀리서 가져와 쌓았고, 조선시대 인조 때는 근처의 편마암으로 장방형 돌을 만들어 쌓았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숙종 때 외성을 중축할 때는 큰 돌 사이에 작은 돌을 박는 그랭이 공법을 사용했습니다. 이 그랭이 공법은 불국사의 석축에서도 볼 수 있는 기법으로, 돌과 돌을 서로 단단히 조여주어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에도 버틸 수 있게 만드는 내진 설계입니다. 그랭이 공법의 핵심은 주춧돌과 기둥의 관계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납니다. 매끈한 주춧돌을 구하지 못했을 경우, 울퉁불퉁한 주춧돌 표면에 기둥 모양대로 선을 그은 뒤 주춧돌 형태에 맞춰 기둥을 깎아 세웠습니다. 이렇게 하면 주춧돌과 기둥이 서로 맞물려 지진이 발생해도 더욱 단단하게 버틸 수 있습니다. 이는 서로 모양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맞춰가며 함께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편할 수 있지만, 긴 시간을 함께하며 서로 맞춰가다 보면 그 결속력이 더욱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고유섭 선생은 석굴암을 두고 "영국은 인도를 잃어버릴지언정 셰익스피어를 버리지 못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무엇보다 귀중한 보물이 바로 이 석굴암의 불상이다"라고 극찬했습니다. 이는 석굴암이 단순한 종교 유적을 넘어 민족 문화의 정수이자 정체성의 상징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장엄함 뒤에 가려진 노동과 사회 구조, 그리고 복원 과정에서 발생한 왜곡과 변형까지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석굴암이 보여주는 평온한 본존불의 미소는 시간을 초월한 예술의 가치를 전하지만, 그 공간이 담고 있는 역사적 긴장과 복원의 흔적까지 함께 읽어야만 온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석굴암은 인간의 손으로 조성한 인공 석굴 속에 우주적 질서와 과학적 원리를 담아낸 공간입니다. 통일신라의 기술과 미의식은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를 보여주며,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건축의 본질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잘못된 보수와 현대적 복원 기술이 어떤 변화를 낳았는지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석굴암은 통일신라의 본래 모습이자, 동시에 복원 역사가 남긴 흔적입니다. 그랭이 공법이 보여주듯, 서로 다른 것들이 맞춰가며 만들어낸 결속력이야말로 진정한 문화유산의 가치일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를 성찰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고민해야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석굴암은 왜 인공 석굴로 만들어졌나요? A. 우리나라의 돌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너무 단단해서 인도나 중국처럼 자연 암반에 굴을 파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통일신라의 장인들은 돌을 깎아 인공적으로 석굴을 조성하는 방법을 선택했으며, 이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석굴 사원을 만들어냈습니다. Q. 일제강점기 보수가 석굴암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A. 일제는 무너진 천정을 복구하면서 2미터 두께의 시멘트를 발랐고, 바닥의 지하수를 막아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석굴암 본래의 자연통풍과 습도 조절 기능이 상실되었고, 1년 만에 습기와 이끼가 발생하여 현재는 인공 설비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Q. 그랭이 공법이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나요? A. 그랭이 공법은 큰 돌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넣어 서로 단단히 조여주는 내진 설계 기법입니다. 주춧돌과 기둥을 서로 맞물리게 하여 지진에도 견딜 수 있으며, 이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맞춰가며 관계를 단단히 하는 철학적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2zW8rLLN0ss&list=PLy90vVBmFvMYxdiZLVQogvcekqZSUFqDL&index=17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gohappyj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