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여운형이라는 이름을 제대로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승만이나 김구는 교과서에 굵직하게 나오지만, 여운형은 단편적으로만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해방 직후 역사를 들여다보면, 여운형이야말로 당시 가장 많은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945년 12월 여론조사에서 33%의 압도적 지지율로 1위를 차지했고, 김구나 이승만보다 높았습니다(출처: 성구 잡지 여론조사). 그가 왜 역사에서 희미해졌는지, 그리고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남기는지 정리해봤습니다.
좌우합작을 끝까지 밀어붙인 여운형의 선택
여운형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즉시 발족했습니다. 사실 이게 가능했던 건 그가 1944년부터 건국동맹이라는 지하조직을 통해 이미 준비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항복 직전 그를 급히 찾아와 협조를 요청했을 때, 여운형은 서대문형무소 정치범 석방, 3개월치 식량 확보, 건국 준비 활동 보장 등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고, 이를 관철시켰습니다. 여기서 건국동맹이란 일제 말기 독립운동가들이 광복 이후를 대비해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로, 좌우를 아우르는 통일전선 구축을 목표로 했습니다.
건준은 전국 각지에 지부를 두며 치안 유지와 정부 수립 준비를 동시에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이 조직은 단 3주만에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내부에서 사회주의 계열과 민주주의 계열의 갈등이 불거졌고, 9월 들어선 미군정이 건준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운형은 이 과정에서 누구보다 발로 뛰었습니다. 해방 직후 희문학교에서 그는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이제 개인의 영주인은 단연 없애고 끝까지 일사불란한 단결로 나아가자."
저는 여기서 그가 왜 대중의 지지를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민중 곁에 있었고, 이념보다 독립 완성을 우선했습니다. 그의 말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겁니다. "과거 어두컴컴한 간방에서 더듬더듬 걷다가 탁 부딪친 후에 너는 누구냐 물으면, 나는 공산주의자다, 나는 민주주의자다 하며 껴안고 어쩔 줄 모르던 혁명 투사들 간에는 민주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없었던 것 아닌가?" 이 문장은 해방 직후 좌우 대립이 격화되던 시기에, 그가 얼마나 통합을 갈구했는지 보여줍니다.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모스크바3상회의 결과를 오보로 보도했습니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내용이었는데, 실제로는 정반대였습니다. 미국이 10년까지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소련이 즉시 독립을 지지했습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여기서 신탁통치(Trusteeship)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 준비가 덜 된 지역을 국제연합 등이 일정 기간 관리·지원하는 제도를 의미합니다. 이 오보는 세계 10대 오보 중 하나로 꼽히며, 국내를 반탁 시위로 들끓게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이 오보가 좌우 대립을 결정적으로 격화시켰다는 점입니다. 박헌영 등 좌익 인사들이 뒤늦게 모스크바3상회의가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한 것임을 알고 찬탁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국내는 반탁과 찬탁으로 갈라졌습니다.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을, 박헌영은 찬탁을 주장했고, 여운형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가 필요하다"며 찬탁 입장을 냈습니다. 저는 여기서 그가 얼마나 큰 오해와 공격을 감수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신탁통치 자체를 원한 게 아니라,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목표를 위해 현실적 경로를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1946년 6월,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한다"고 발언했습니다. 이게 바로 정읍발언인데, 사실상 분단을 공식적으로 입에 올린 최초의 발언이었습니다. 여기서 단독정부(單獨政府)란 남북 통일 정부가 아닌, 남한만의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의미로, 이후 남북 분단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이승만의 선택이 현실 정치의 산물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동시에 그가 통일 정부 가능성을 너무 일찍 포기한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당시 미소공동위원회는 휴회 상태였지, 완전히 결렬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무기 휴회된 공의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며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응해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했고, 좌우합작 7원칙에 합의하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습니다.
좌우합작 7원칙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3상회의 결정에 의거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 토지는 무상몰수 유상분배 원칙
-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처단
- 전국적 정당·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민주의원 설치
여운형은 이 합의를 북한에도 관철시키기 위해 38선을 넘어 김일성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는 수염을 깎고 농민 복장으로 변복해 위험을 무릅쓰고 월북했습니다. 미군정이 반대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집안에서 내가 윗방으로 가든 아랫방으로 가든 객이 웬 상관이냐?" 그는 김일성에게 조만식 석방, 토지개혁 중단, 통일 방안 논의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국제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었고, 미소 양국은 돌이킬 수 없는 대립 구도로 들어섰습니다.
이승만의 현실 정치와 여운형 암살이 남긴 질문
이승만은 해방 직후 미국에서 귀국해 강력한 반공 노선을 내세우며 정부 수립을 주도했습니다. 저는 그의 선택이 당시 국제 정세와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위기의식을 반영한 현실 정치였다고 생각합니다. 미군정과의 협력, 외교력 발휘, 체제 안정 우선이라는 그의 전략은 분명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중요한 축이었습니다. 하지만 장기 집권, 권력 집중, 부정선거로 이어진 통치 과정은 민주주의의 토대를 약화시켰고, 반대 세력에 대한 강경 대응은 정치 문화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승만이 만약 더 이른 시점에 권력 이양과 제도적 균형을 선택했다면, 한국 정치 문화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유산은 국가 형성의 중요한 한 축이지만, 동시에 민주주의 가치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남깁니다. 한국전쟁 초기 대응과 민간인 희생 문제 역시 역사적 논쟁의 대상입니다. 국가 건설이라는 명분이 권력 유지로 변질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반면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서울 한복판에서 암살되었습니다. 암살범은 19세 한지근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신원조차 불확실합니다. 당시 여운형의 차 앞을 트럭이 가로막았고, 경찰은 암살범이 아닌 여운형의 경호원을 오인해 체포했습니다. 이 때문에 진범은 도주했고, 배후 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1974년 27년 만에 공범 4명이 나타났지만,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뒤였고,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출처: 국가보훈처).
더 의문스러운 건 1946년 7월 17일, 여운형이 세 명의 괴한에게 납치됐을 때입니다. 납치범이 대동신문에 전달하려던 편지를 미군정이 먼저 손에 넣었지만, 납치범 김다를 체포하지도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여운형에 대한 테러 위협과 암살 배후에 미군정이 어느 정도 관여했거나 최소한 묵인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여운형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혁명가는 침상에서 돌아가는 법이 없다. 나도 서울 한복판에서 죽을 것이다." 그의 예언대로 그는 서울 한복판에서 암살되었고, 그의 죽음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도 사실상 해체되었습니다. 1962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건국훈장을 받았지만, 여운형은 2005년에야 건국훈장을 받았고, 2008년에야 가장 높은 등급인 대한민국장으로 추서되었습니다. 그가 좌도 우도 아닌 중도였기에, 해방 이후 냉전 체제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겁니다.
저는 여운형의 이 말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분열에 있는 것은 소위 지도자뿐이요, 민중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주인은 민중인데 주인의 신부름꾼인 지도자들이 주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분열만 일삼으면 주인이 쫓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정치 상황을 보면, 이 말이 80년 전 해방 직후가 아니라 오늘 한 말처럼 들립니다. 정치인은 국민의 의견을 듣고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와도 만날 수 있고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운형은 자신을 나침반에 비유했습니다. "배가 요동하는데 나침반이 계속 한 곳에 멈춰 있다면 그 바늘은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지금 파도처럼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오히려 나는 내 노선을 일관되게 고수하기 위해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파도에 흔들리는 배에서 쉴 새 없이 움직였던 나침반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질문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념과 진영 논리를 넘어, 진짜 민중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는가?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대통령 기록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8BaOIW6Z8xY&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44&t=39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