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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소통법 (탕평책, 경연 활용, 진정성)

by gohappyjan 2026. 2. 27.

영조
영조

영조는 52년이라는 조선 역대 최장 재위 기간 동안 탕평책을 내세워 붕당 정치의 갈등을 조율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숙빈 최씨로 신분이 낮았고, 이복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까지 받았죠. 저는 처음 이 기록을 접했을 때, 이런 불리한 출발점에서 어떻게 안정적인 통치가 가능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 답은 영조만의 독특한 소통 방식에 있었습니다.

탕평책이 실제로 균형을 만들었을까

영조는 즉위 직후 "나는 마땅히 인재를 취하여 쓸 것이니 당습에 관계된 자를 내 앞에 천거하면 그 자를 내치고 귀양 보낼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서 탕평책(蕩平策)이란 특정 붕당에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정치적 균형을 추구하는 정책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노론과 소론 양측을 모두 기용하며 어느 한쪽의 독주를 막겠다는 선언이었죠.

실제로 영조는 자신을 지지한 노론뿐 아니라 반대파였던 소론에게도 중책을 맡겼습니다. 심지어 즉위 초 발생한 이인좌의 난을 진압할 때도 소론을 투입했습니다. 만약 노론을 시켜 반란을 진압했다면 소론 세력이 대거 숙청되고 노론의 권력이 비대해졌을 겁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영조의 계산이 얼마나 치밀했는지 새삼 느꼈습니다.

하지만 탕평책이 진정한 수평적 소통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조선시대 붕당 정치는 왕권과 신권의 견제 구조 속에서 작동했습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영조의 탕평은 표면적으로는 균형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왕권 중심의 통제 메커니즘으로 기능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반대 의견을 포용하기보다 인사권을 활용해 양측을 견제하며 질서를 유지한 측면이 강했던 거죠.

영조의 탕평이 구조적 갈등의 해결이었는지, 아니면 갈등을 봉합하는 임시방편이었는지는 여전히 논쟁적입니다. 제 생각엔 후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만약 더 제도화된 협의 구조를 마련했다면 당파 갈등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경연을 권력 견제 수단으로 역이용하다

경연(經筵)이란 왕이 신하들과 함께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토론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왕의 학습과 동시에 신하들이 왕을 가르치고 견제하는 이중적 기능을 가진 자리였죠. 대부분의 왕에게 경연은 부담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신하들의 비판과 조언을 들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영조는 이 경연을 오히려 적극 활용했습니다. 영조의 학문적 수준은 신하들을 압도했습니다. 경연 준비가 부족한 신하들은 영조에게 호되게 질책당했고, 영조는 경연장을 통해 "왕에 대한 충성의 방향을 제시해 보라"는 과제를 내렸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영조의 전략이 매우 독특했다고 생각합니다. 견제 장치를 거꾸로 이용해 신하들을 관리한 셈이니까요.

조선시대 경연 제도는 군주권을 제약하는 핵심 장치였습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그러나 영조는 경연을 왕권 강화의 도구로 전환시켰습니다. 신하들이 기진맥진할 정도로 열성적으로 참여하며 주도권을 쥐었죠. 이런 방식은 소통이라기보다 조율된 통제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에도 한계는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인 아들 사도세자와의 소통에서는 완전히 실패했으니까요. 뒤주에 세자를 가둔 비극은, 영조의 소통이 결국 권력 관계 안에서만 작동했음을 보여줍니다. 솔직히 이 사건을 볼 때마다 영조의 소통법이 과연 진정성 있는 것이었는지 회의가 듭니다.

그림과 순문으로 보여준 백성과의 접점

영조는 백성과의 소통에도 나름의 방식을 개척했습니다. 그는 삽살개 그림 위에 "밤에 대문을 지키는 것이 네 임무인데 어찌 대낮에 길에서 짓느냐"라는 글을 적어 탕평에 협조하지 않는 신하들을 우회적으로 질타했습니다. 또한 직접 그린 그림에 "백성이 미미해 보이더라도 항상 두려워하며 그들의 어려움을 생각해야 한다"는 문구를 남겼죠.

순문(巡問)은 왕이 궁궐 밖으로 나가 백성들의 의견을 직접 듣는 행사입니다. 여기서 순문이란 군주가 민생을 살피기 위해 백성을 직접 만나는 순행 제도를 의미합니다. 영조는 재위 52년 동안 무려 129차례나 순문을 시행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빈도는 형식적 행사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실제로 민심을 읽으려는 의지가 있었다고 봐야죠.

청계천 준설 사업도 주목할 만합니다. 영조는 백성들의 의견을 직접 듣고 공사를 결정했으며, 지방에서 올라온 실업자들에게는 임금을 지급했습니다. 한양 백성들에게는 "청계천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은 산 밑 백성들이 나무를 마음대로 베어 흙과 자갈이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라며 연대 책임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습니다.

이 준천 사업은 1760년 2월부터 4월까지 57일간 21만 5천여 명이 동원된 대규모 토목공사였습니다. 이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보다 170년 앞선 공공 고용 창출 사업이었습니다. 여기서 뉴딜 정책(New Deal)이란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 정부가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해 실업자를 고용하고 경기를 부양한 정책을 말합니다.

영조의 백성 소통 방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그림과 글씨를 통한 상징적 메시지 전달
  • 순문 129회 시행으로 직접 민심 청취
  • 청계천 준설 시 백성 의견 수렴 및 임금 지급

하지만 이런 소통이 구조적 변화로 이어졌는지는 의문입니다. 백성의 목소리를 듣는 것과 그 목소리가 실제 정책에 반영되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요.

영조의 소통법은 분명 당대 기준에서는 혁신적이었습니다. 탕평책으로 붕당 갈등을 조율하고, 경연을 역이용해 신하를 견제하며, 백성과의 접점을 만들려 노력했죠. 하지만 그의 소통이 진정한 합의의 과정이었는지, 아니면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관리 기술이었는지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습니다. 저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둡니다. 특히 사도세자 사건은 그의 소통법이 결국 권력 구조 안에서만 작동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오늘날 리더십을 논할 때 영조를 참고한다면, 그의 방법론뿐 아니라 그 한계까지 함께 살펴야 할 것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th2GBQxZlNw&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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