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삼국시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시기 중 하나였습니다. 견훤과 궁예라는 강력한 영웅들이 각축을 벌이던 시대에, 이인자였던 왕건은 어떻게 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을까요. 왕건은 단순히 군사적 승리만으로 후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민심을 얻고 상생을 도모하며 포용력을 발휘하는 6가지 통합의 법칙을 실천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왕건의 통합 리더십을 살펴보겠습니다.
왕건이 민심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
후삼국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심을 얻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신라는 급격히 쇠퇴하고 있었지만 천년을 이어온 역사를 가진 나라였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신라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후삼국을 통합하려면 신라를 받드는 민심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궁예는 신라의 수도 금성을 별도라고 부르게 했고, 신라에서 벼슬하던 자들은 모두 죽였습니다. 심지어 영주의 부석사를 방문했을 때는 신라 왕의 화상을 칼로 그어버리는 불경한 일까지 저질렀습니다. 이런 궁예의 행동에 신라의 민심이 그에게 향할 리 없었습니다. 견훤 역시 927년에 신라를 공격해서 경애왕을 죽이고 비빈들을 겁탈했으며, 신라를 약탈하고 수많은 신라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러한 견훤의 만행으로 인해 민심은 견훤에게서도 멀어졌습니다. 반면 왕건은 신라에 대해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견훤이 신라를 약탈하고 난 후 뒤늦게 신라의 초청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신라로 갔을 때, 신라 사람들의 반응은 극명했습니다. "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사나운 승냥이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오신 왕건을 보니 꼭 부모를 만난 것 같네." 이 말에서 신라의 민심이 이미 왕건에게 기울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건의 민심을 얻기 위한 노력은 더욱 세심했습니다. 골부(지금의 영천)의 장군 눈문이라는 사람이 왕건에게 귀부를 해오자, 왕건 입장에서는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왕건은 그를 위로하고 타일러서 도로 돌려보냈습니다. 왜냐하면 골 버리는 신라의 수도와 너무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왕건은 신라를 압박하지 않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민심을 얻었던 것입니다.
| 인물 | 신라에 대한 태도 | 민심의 반응 |
|---|---|---|
| 궁예 | 금성을 멸도라 부름, 신라 관리 처형, 신라 왕의 화상 훼손 | 반감과 거부 |
| 견훤 | 경애왕 시해, 비빈 겁탈, 신라 약탈 | 공포와 적대감 |
| 왕건 | 신라 존중, 골부 장군 귀부 거절(배려), 신라 방어 | 부모를 만난 듯한 신뢰 |
이처럼 왕건은 민심을 얻기 위해 신라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주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을 진정으로 생각해 주는 지도자를 원했고, 왕건은 그러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천심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민심은 곧 천심이라는 말처럼, 왕건의 민심 확보 전략은 후삼국 통일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왕건의 포용력과 상생의 리더십
왕건의 통합 전략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바로 포용력입니다. 궁예는 권력에 집착하여 관심법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고, 심지어 자신의 부인과 아들까지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이런 궁예의 폭정 때문에 궁예 편에 섰던 호족들은 점점 궁예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견훤 역시 대야성을 공격하고 돌아오는 길에 금성을 약탈했는데, 이는 그 지역의 호족들을 적으로 만드는 행위였습니다. 이들은 힘 있는 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 왕건은 호족들이 자신에게 귀부해 오면 그들에게 땅을 내어주고 존중해 주며 대접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호족들과 "우리는 함께 갈 것이다"라는 굳은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호족의 딸들과 결혼했습니다. 왕건에게는 무려 여섯 명의 왕후와 스물세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모두 합하면 스물아홉 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이는 왕건 개인의 욕심이 아니라 호족들과의 혼인 동맹을 통한 상생의 정치였습니다. 왕건의 포용력은 적대 세력에 대해서도 발휘되었습니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상주 지역의 유력한 호족이었는데, 견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견훤은 아자개의 첫 번째 부인의 맏아들이었고, 아자개는 다른 부인과 이복동생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견훤은 아버지와 손을 잡지 못했고, 아자개는 왕건에게 귀부 했습니다. 왕건은 아자개를 융숭하게 대접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견훤에 대한 왕건의 태도입니다. 935년 견훤은 자신의 아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왕건에게 귀부 했습니다. 왕건 입장에서 견훤 때문에 죽을 뻔했었고, 견훤 때문에 많은 충직한 신하들을 잃었습니다. 공산 전투에서는 신숭겸 장군을 비롯한 팔공신들이 왕건을 대신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견훤의 귀부를 받아주고 견훤을 상부라고 해서 아버지처럼 섬겼다고 합니다. 왕건이 원수 같은 견훤까지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고 신라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은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워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또 약해질 수도 없으니, 차마 죄 없는 백성들의 피와 내장이 땅에 쏟아지게 하는 일은 할 수가 없다"라며 고려에 항복을 결정했습니다. 이는 왕건의 포용력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왕건은 또한 호족들과의 상생을 위해 사성정책을 실시했습니다. 다른 호족들에게는 왕 씨 성을 하사해주고 그들을 왕족처럼 대우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 시기 많은 호족들은 왕건으로부터 성을 하사 받기도 하고, 새로운 호족 세력으로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왕건은 각 호족들에게 그들이 살 땅과 근거지를 내어주고, 그 지역의 이름을 따서 성과 본관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성씨와 본관이 이 시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왕건은 호족 세력들과 상생을 도모하면서 그들을 확실한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민생을 챙기고 비전을 제시한 통합 정치
후삼국시대는 새로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누가 강력한 세력을 만드느냐, 혹은 누가 더 많은 호족 세력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느냐가 중요했습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생활은 뒷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왕건은 달랐습니다. 왕건은 백성들의 살림, 즉 민생까지 챙겼던 것입니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고 나서 토지제도를 새롭게 개정하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한도를 규정했습니다. 세금을 규정 밖에 거두어들이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통일신라 말에 진골 귀족들에게 온갖 수탈을 당하던 백성들, 게다가 흉년으로 더 힘들었던 백성들에게 세금을 줄여주고, 심지어는 3년 동안 세금을 거두어들이지 않기도 했습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이보다 고마운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굶어 죽는 백성들을 위해서 흑창이라는 것을 설치했습니다. 흑창은 굶어 죽을 만한 어려운 상황에 처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는 창고를 뜻합니다. 이렇게 왕건은 새로운 시대를 열면서 백성들의 민생까지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단순히 군사적 통일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통일 이후 백성들이 실제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왕건은 또한 명확한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태조가 즉위하자 국호는 고려로 정하고 연호를 천수라고 했습니다. 고려는 고구려와 같은 말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연호를 발표했는데, 천수는 하늘의 뜻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연호라는 것은 연도를 뜻하는데, 그 당시에는 중국의 황제들이 정하는 연호를 주변 나라들이 따라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왕건은 독자적인 연호를 발표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 있는 왕건의 능 근처에서 발견된 청동상은 왕건의 모습을 본뜬 것으로 보이는데, 이 왕건의 청동상에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이 통천관이라는 것입니다. 이 통천관은 중국의 황제들만 쓰는 관이었습니다. 그러니 고려가 나라를 세우면서 황제국을 지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굉장한 비전을 제시해 준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데 우리도 황제국이라고 선포를 했던 것입니다. 고려는 수도를 개경으로 두었지만, 서경을 또 하나의 수도로 두고 백성들을 서경에 옮겨 살게 했습니다. 서경은 지금의 평양, 그러니까 고구려의 수도가 있던 곳입니다. 역시 고구려를 계승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북쪽으로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북쪽에는 거란 세력이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에, 거란을 견제하기 위한 북방 정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란에 의해서 발해가 위기를 맞게 되고 멸망에 이르게 되자, 발해의 백성들이 대거 고려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고려가 건국된 것은 918년이고 발해가 멸망한 것은 926년입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것은 한참 뒤인 936년이었습니다. 고려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고려보다 강력한 세력인 후백제가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새로운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이게 되면 고려 안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이들 발해 유민들을 동족으로 간주해서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했습니다.
| 정책 | 내용 | 의미 |
|---|---|---|
| 국호와 연호 | 국호 고려, 연호 천수, 통천관 착용 | 고구려 계승, 황제국 지향 |
| 서경 정책 | 평양을 제2수도로, 백성 이주 | 북방 영토 회복 의지, 거란 견제 |
| 발해 유민 포용 | 발해 태자 대광현에게 왕계 성 하사 | 동족 의식, 영토 확장 효과 |
특히 발해 태자 대광현에게는 왕계라는 이름을 주고 선조에 대한 제사를 받들게 해 주었으며, 왕실 족보에도 그 이름을 넣어 주었다고 합니다. 발해를 같이 고구려를 계승한 동족으로서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던 것입니다. 이는 곧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것을 또 한 번 강조하는 것과 함께, 다른 민족들을 받아들여서 더 큰 고려를 꿈꾸겠다는 비전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귀순하게 되면서, 놀랍게도 발해 유민들이 저 북쪽 지역에 정착하게 되면서 고려의 땅이 더 넓어지는 놀라운 효과가 생겨났습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군사적 역량만이 아니라, 민심을 얻고 포용력을 보이며 상생을 도모하고 민생을 챙기며 명확한 비전을 제시한 통합 리더십의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밑바탕에는 "우리"라는 리더의 마인드가 있었습니다. 왕건은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하나로 아우르려는 진정한 통합의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후백제를 멸망시킨 항산, 지금의 논산에 개태사라는 절을 세워 화합을 상징했고, 그곳의 철학이라는 큰 솥은 수백 명의 승려가 한꺼번에 공양할 수 있는 대규모 시설로 진정한 하나 됨을 보여주었습니다. 타협과 포용의 정치가였던 왕건의 선택은 단기적 안정의 토대였지만, 장기적으로는 호족 세력의 자율성을 인정한 구조가 분권적 긴장을 남긴 측면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건의 통합 리더십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배울 점이 많은 역사적 교훈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왕건이 29명의 부인을 둔 것은 개인적 욕심이 아니었나요?
A. 왕건의 혼인 정책은 개인적 욕심이 아니라 호족들과의 정치적 연합을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당시 각 지역의 호족들은 독립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왕건은 이들과의 혼인 동맹을 통해 안정적인 통합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여섯 명의 왕후와 스물세 명의 부인은 모두 유력한 호족의 딸들로, 이는 상생의 정치를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Q. 왕건은 왜 원수였던 견훤까지 받아들였나요?
A. 왕건은 견훤을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포용력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공산 전투에서 왕건은 견훤 때문에 죽을 뻔했고 신숭겸 장군을 비롯한 팔공신을 잃었지만, 935년 견훤이 아들에게 배신당하고 귀부 했을 때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복수보다 통합을 우선시한 결정으로, 이러한 모습을 본 신라도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게 되었습니다.
Q. 왕건의 통합 정책이 후대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A. 왕건의 호족 포용 정책과 사성정책은 우리나라 성씨와 본관 제도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발해 유민을 받아들인 개방성은 고려가 우리 역사상 가장 활발한 무역 국가가 되는 기반이 되었고,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의 말을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실시하는 등 능력 중심의 인재 등용이 가능해졌습니다. 왕건의 유연성과 개방성은 고려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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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강 선생의 친절한 역사학 / 후삼국 통일의 주역, 왕건에게 배우는 6가지 통합의 법칙 https://www.youtube.com/watch?v=0POosRyP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