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도 처음 우장춘 박사 이야기를 접했을 때는 솔직히 복잡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매국노 우범선의 아들이 과연 진심으로 조국을 위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죠. 그런데 그가 일본에서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1950년 3월 홀로 귀국한 뒤 보여준 행보를 보면, 단순히 애국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방 후 우리는 식량 위기에 직면했고, 일본산 종자에 의존하던 농업 구조는 그대로 붕괴 직전이었습니다. 종자 한 대 값이 쌀 한 가마니에 육박할 정도였으니, 이건 단순한 농업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던 겁니다.
품종개량으로 바꾼 한국 농업의 기초
우장춘 박사가 귀국 후 가장 먼저 손댄 것은 배추와 무 같은 기본 채소의 종자 개량이었습니다. 저도 어릴 적 할머니 댁에서 본 배추가 속이 거의 안 찬, 지금으로 치면 상추에 가까운 모양이었던 기억이 나는데요. 그 당시 조선 배추는 실제로 그런 상태였다고 합니다. 배춧잎이 얇아서 소금에 절이면 금방 풀이 죽어버렸고, 김장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우장춘 박사는 종간교잡(種間交雜)이라는 육종 기술을 활용해 조선 배추와 양배추를 합성했습니다. 여기서 종간교잡이란 서로 다른 종의 식물을 인위적으로 교배시켜 새로운 품종을 만드는 기술을 의미합니다. 이 방법으로 탄생한 것이 지금 우리가 김장철마다 보는 속이 꽉 찬 배추입니다. 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같은 땅, 같은 종자로 심어도 크기가 제각각이고 맛도 일정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를 균일한 크기와 맛을 가진 품종으로 표준화했습니다.
특히 감자 품종 개량은 강원도 농민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강원도는 논농사가 어려운 지형 특성상 감자가 주요 작물이었지만, 바이러스 감염에 취약해 수확량이 불안정했습니다. 우장춘 박사는 바이러스 저항성이 강한 감자 품종을 개량해냈고, 이것이 지금 강원도 감자가 전국 최고 품질로 인정받는 기반이 되었습니다(출처: 농촌진흥청).
제주도의 경우는 더욱 극적입니다. 화산토 지형에 논농사는 불가능하고 밭농사도 쉽지 않았던 제주도에, 그는 일본에서 가져온 유채 종자를 제주 풍토에 맞게 개량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이 감귤나무입니다. 제주도의 기후와 토양에 최적화된 감귤 품종을 개량해 내면서, 제주도는 경제적으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대학나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감귤 한 그루면 자식 대학 등록금을 댈 수 있었으니, 이건 단순한 농업 기술이 아니라 지역 경제 전체를 바꾼 혁신이었던 겁니다.
우장춘 박사가 이룬 주요 성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배추: 조선 배추와 양배추 종간교잡으로 속이 찬 김장용 배추 개발
- 무: 균일한 크기와 맛을 가진 표준 품종 확립
- 감자: 바이러스 저항성 품종으로 강원도 농업 안정화
- 유채·감귤: 제주도 특화 작물 육성으로 지역경제 활성화
귀국 결정과 그가 남긴 질문들
저는 개인적으로 우장춘 박사의 귀국 결정이 과연 순수하게 애국심만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는 일본에서 이미 충분한 명성과 안정된 연구 환경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여섯 자녀와 일본인 아내, 그리고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를 일본에 남겨두고 홀로 조선행을 택한다는 건 보통 결심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죠.
그를 그렇게 만든 건 어머니의 말 한마디였다고 합니다. "너는 조선인 아버지를 둔 조선인이다. 조선을 위해 큰 일을 해야 한다." 실제로 그의 어머니는 우범선이 미리 우장춘의 호적을 조선에 등록해두었던 사실을 평생 강조했고, 우장춘은 이를 근거로 일본 당국의 반대를 뚫고 조선인 수용소에 자진 입소해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이건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정체성에 대한 뿌리 깊은 고민의 결과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귀국 후 그가 마주한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로 연구는 중단 위기에 처했고,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도 여권을 받지 못해 임종조차 보지 못했습니다. 당시 한일 관계 악화와 독도 문제로 인해 정부는 그의 일본 방문을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죠. 그때 모인 조위금을 그는 가족에게 보내지 않고 한국농업연구소에 우물을 파는 데 썼습니다. '자유천(慈乳泉)'이라는 이름으로요. 어머니의 젖과 같은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 우물은 지금도 부산 동래구에 남아 있습니다(출처: 문화재청).
솔직히 이 부분에서 저는 좀 복잡한 감정이 듭니다. 과학자로서의 헌신은 인정하지만, 그가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기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식민지 체제 속에서 과학자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제한적이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그 시기를 면죄부로 받아들일 수는 없죠. 또한 그가 이룬 품종 개량 중심의 농업 정책이 과연 소농 구조와 지역 생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과학의 진보가 항상 사회적 형평성과 직결되는 건 아니니까요.
우장춘 박사는 1959년 8월 7일 문화훈장을 받고 "이제야 조국이 나를 인정했구먼"이라며 울먹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3일 후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시신은 수원 농촌진흥청 자리에 묻혔고, 머리카락과 손발톱만 일본으로 보내졌습니다. 아버지 우범선의 무덤은 일본에 있지만, 우장춘의 무덤은 한국 땅에 있습니다. 그는 약속대로 한국에 뼈를 묻었습니다.
만약 그에게 더 안정된 연구 환경과 정책적 지원이 있었다면, 한국 농업은 어떤 방향으로 발전했을까요? 그가 남긴 씨 없는 수박, 통일벼 등의 성과는 분명 식량 문제 해결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과학과 권력, 국가 정책의 관계를 성찰하게 합니다. 저는 그의 업적을 기리면서도, 그 과정과 맥락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하게 됩니다. 우장춘은 실용적 과학자였을까, 시대의 경계에 선 지식인이었을까. 답은 아마 둘 다일 겁니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미남 교차로와 금강식물원을 잇는 도로에는 우장춘 박사를 기념하는 우장춘기념관이 세워져 있고,우장춘박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2009년7월8일 도로명을 우장춘로 라고 명명하였다. 전 구간 부산광역시도 제7192호선으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oJdA8sdZH_c&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