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중섭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입니다. 그의 작품 속 소와 아이는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시대의 고통과 희망을 담은 민족적 상징입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가족과의 이별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이중섭은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억압받은 민족의 저항정신과 가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중섭의 소 그림과 아이 그림, 그리고 그의 독창적인 화법을 통해 한국인의 정서가 어떻게 예술로 승화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중섭의 소 그림, 민족정서를 담다
이중섭의 소 그림은 그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상징입니다. 1950년대 그린 역동적인 소 그림들은 우리 눈에 가장 익숙하지만, 초창기 1940년 작품인 '환상적인 바다풍경'에서도 이미 소는 중요한 소재였습니다. 이중섭이 소를 그리게 된 배경에는 오산학교에서의 교육이 있었습니다. 오산학교는 1907년 이승훈이 세운 민족학교로,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함석헌이 역사 선생님으로 재직하던 곳이었습니다. 이 학교에서 이중섭은 민족적 사상과 생각을 키워나갔습니다. 이중섭의 예술 세계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준 인물은 임용빈과 백남순 부부였습니다. 임용빈은 미국 예일대학교 서양화과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백남순 역시 유럽에서 서양화가로 활동하던 세계적 수준의 예술가였습니다. 이들은 프랑스에서 결혼 후 조국을 위해 오산학교 미술교사로 왔고, 이중섭에게 "밑그림을 바닷가 모래알보다 더 많이 그려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중섭은 이 가르침에 따라 주변의 소를 집중적으로 관찰했습니다. 소도둑으로 오해받을 정도로 소 옆에 붙어서 소의 근육 움직임과 심지어 소의 마음까지 읽으려 노력했습니다. 1941년 이중섭은 조선신미술과협회에서 활동하며 민족적 미술운동을 펼쳤습니다. 자유미술과협회전에 출품한 '서 있는 소'는 일제강점기 억눌린 민족의 저항 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이 소의 눈빛은 우리가 흔히 아는 맑고 선한 소의 모습이 아니라, 무언가에 대항하려는 강렬한 의지로 가득합니다. 같은 시기 야마모토 마사코와의 사랑에 빠진 이중섭은 엽서에 평화롭고 밝은 소 그림들을 그렸는데, 이는 사랑으로 인한 화가의 심리 상태가 그대로 작품에 반영된 사례입니다. 1943년 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유학길이 막히고 일본에서의 징집 위기로 이중섭은 조선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마사코와 이별하며 자유미술과협회전에서 상으로 받은 팔레트를 프러포즈 선물로 주었고, 마사코는 이 팔레트를 70년간 보관하다 2012년 제주 이중섭미술관에 기증했습니다. 이별 후 원산에서 그린 그림들은 좌절과 암울함으로 가득했지만, 1945년 마사코가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는 마지막 배를 타고 찾아오면서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됩니다.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남덕'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고, 이때부터 작품에 닭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1953년 작품 '부부'는 수탉과 암탉이 날갯짓하며 사랑을 나누는 행복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기 그린 두 마리 수탉이 싸우는 '닭' 그림은 남북한의 긴장관계와 이중섭 내면의 갈등을 상징합니다. 1954년 그린 대표작 '흰 소'는 역동적인 붓질로 생명력을 표현했으며, '싸우는 소'는 한국전쟁 또는 경제적 현실과 예술적 이상 사이의 자아 갈등을 보여줍니다. 1983년 유니온제약 신입사원이었던 안병광은 비 오는 날 이중섭의 황소 그림에서 "조금만 더 힘을 내봐, 할 수 있을 거야"라는 메시지를 받고 7천 원에 그림을 구입했습니다. 이후 그는 유니온제약 대표가 되었고, 2010년 진품을 35억 6천만 원에 낙찰받아 서울미술관을 열었습니다.
| 시기 | 작품 | 특징 |
|---|---|---|
| 1940년 | 환상적인 바다풍경 | 초창기 소 그림 |
| 1941년 | 서 있는 소 | 민족 저항 의식 표현 |
| 1950년대 | 흰 소 | 역동적 생명력 |
| 1954년 | 싸우는 소 | 내면 갈등과 시대상 |
이중섭의 아이 그림, 가족애의 결정체
이중섭의 작품에서 소만큼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바로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이 물고기와 노는 모습, 줄을 잡고 노는 모습은 이중섭 예술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합니다. 이중섭이 아이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에는 개인적 비극이 있었습니다. 마사코와 낳은 첫 아이가 디프테리아로 1년도 되지 않아 사망했고, 이중섭은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당시 학교 미술교사였던 이중섭은 교육에 소질이 없어 학교를 그만두고 고아원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첫 아이를 혼자 보낼 수 없었던 이중섭은 아이 그림을 그려 관 속에 함께 넣어주었습니다. 아이들과 동무 삼아 놀라는 의미와 함께 복숭아 그림도 그렸는데, 복숭아는 무릉도원을 상징하며 저승에서 극락왕생하라는 염원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후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이중섭의 자유로운 예술활동은 억압받았습니다. 집안의 가장이었던 형이 끌려가 생사불명이 되었고, 재산은 거의 몰수당했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중섭 가족은 토굴에 숨어 지냈고,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잠시 안도했으나 중공군 개입으로 다시 위기를 맞았습니다. 어머니는 남은 아들 이중섭마저 끌려갈까 염려하여 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월남하라고 했습니다. 이중섭은 어머니와 형수는 원산에 남겨둔 채 조카와 가족을 데리고 1951년 1월 제주도에 도착했습니다. 눈을 맞으며 3일을 걸어 서귀포에 도착한 이중섭 가족은 한 평 남짓한 방에서 네 가족이 머물렀습니다. 제주도에서의 생활은 궁핍했지만 이중섭 가족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귤 농장 그림처럼 밝은 톤의 작품들이 이 시기 탄생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해 물고기, 게, 해초를 수거해 끼니를 때웠고, 이중섭은 게를 많이 잡아먹어 미안해서 물고기와 게 그림을 많이 그렸다고 합니다. 미술 도구를 살 수 없었던 이중섭은 양담배와 초콜릿을 싸던 은지화에 송곳으로 그림을 새기는 독창적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이 은지화 그림은 300여 점이 남아 있으며, 고려청자의 상감기법과 유사한 느낌을 줍니다. 1952년 부산으로 이주한 이중섭은 판잣집을 마련했으나, 마사코의 아버지 사망 소식과 재산 상속 통지로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영양실조와 폐 질환으로 건강이 악화된 가족을 송환선에 태웠지만, 이중섭은 여권이 없어 함께 갈 수 없었습니다. 1953년 지인이 구해준 선원증으로 6일간 일본에서 가족과 재회했으나, 다시 헤어져야 했습니다. 이후 이중섭은 가족에게 수없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의 아스파라거스 잘 지내고 있겠지", "소달구지에 타고 따뜻한 남쪽 나라에 함께 가는 그림을 그렸어"라는 애절한 내용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1954년 편지에는 "세상에 나만큼 자신의 아내를 광적으로 그리워하는 남자가 또 있겠어"라며 만남에 대한 간절함을 표현했습니다. 통영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1954~55년 명동 미도파화랑과 대구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나, 많은 예약에도 불구하고 실제 판매는 저조했습니다. 좌절한 이중섭은 거식증과 정신분열증에 시달렸고,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작품들을 그렸습니다.
| 시기 | 장소 | 주요 사건 |
|---|---|---|
| 1945년 | 원산 | 마사코와 결혼, 첫 아이 사망 |
| 1951년 | 제주 | 가장 행복했던 시기, 은지화 제작 |
| 1952년 | 부산 | 가족과 이별, 일본 송환 |
| 1954~55년 | 서울/대구 | 개인전 개최, 판매 부진 |
이중섭 화법의 독창성, 한국미술의 정체성
이중섭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입니다. 근현대 작품 100점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 1, 2위가 모두 이중섭의 소 그림이었다는 조사 결과가 이를 증명합니다. 이중섭 작품의 힘은 단순히 소재의 친근함에서만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화법 자체가 우리 민족 문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고분벽화 수렵도의 산 모습은 이중섭이 그린 벽화 그림의 산과 닮아 있습니다. 주작도의 새는 이중섭의 '부부' 그림 속 닭과 유사한 느낌을 줍니다. 북한에서 발견된 고구려 고분벽화를 본 이중섭은 큰 영향을 받았고, 남북 분단이 없었다면 고분벽화 모사 작업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습니다.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은 이중섭의 은지화 기법으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고려청자에 새겨진 동자들이 열매를 따는 문양은 이중섭 그림 속 아이들이 복숭아를 따는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오리와 연꽃 같은 도자기 문양도 이중섭 작품에 자주 등장합니다. 김정희의 추사체 역시 이중섭의 필력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추사체의 힘 있는 글씨는 이중섭 그림의 역동적인 붓질로 나타났습니다. 이중섭의 그림은 소나 아이라는 소재뿐 아니라 필력, 색감, 전체 분위기가 우리 민족 문화의 정서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을 전 세계에 올바르고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이라오." 1956년 9월 6일 밤 11시 45분, 이중섭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흘간 무연고자로 영안실에 안치되었다가 뒤늦게 지인이 신원을 확인했습니다. 화장된 유해 일부는 망우리공원에 묻혔고, 일부는 구상 시인이 일본으로 가져가 마사코에게 전달했습니다. 제주도 이중섭이 머물던 집 벽에는 그의 자작시 '소의 말'이 쓰여 있습니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곱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 전통 예술 | 이중섭 작품 | 연결점 |
|---|---|---|
| 고구려 고분벽화 | 벽화 그림, 부부 | 산의 형태, 새의 역동성 |
| 고려청자 상감기법 | 은지화 | 선을 새기는 기법 |
| 추사체 | 흰 소 | 힘 있는 필력 |
이중섭의 삶은 근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의 소는 역경을 이겨낸 우리 민족의 모습이며, 아이들은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의 정서입니다. 그러나 이중섭 예술이 '비극적 천재'라는 서사로만 소비되는 현실은 경계해야 합니다. 작품의 조형성과 실험성보다 불행한 삶이 앞세워질 때 예술은 감정적 신화로 축소됩니다. 고통이 깊을수록 위대한 예술이 나온다는 통념 역시 재고되어야 합니다. 이중섭은 시대의 희생자인 동시에 고통 속에서도 창작을 선택한 주체였습니다. 그의 그림은 삶의 상처를 선명하게 드러낸 기록이자, 끝내 놓지 않은 사랑과 자유에 대한 증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이중섭의 은지화는 어떤 기법으로 제작되나요?
A. 이중섭의 은지화는 양담배나 초콜릿을 싸던 은박지에 송곳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선을 새긴 후 물감을 칠하고 닦아내는 방식입니다. 새긴 틈 사이로 물감이 스며들어 고려청자의 상감기법과 유사한 효과를 냅니다. 미술 도구를 살 수 없었던 궁핍한 상황에서 탄생한 기법이지만, 이중섭만의 독창적 예술 실험이기도 했습니다.
Q. 이중섭이 소를 주요 소재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이중섭은 오산학교에서 임용빈 선생의 지도 아래 주변 사물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당시 흔히 볼 수 있던 소를 집중적으로 관찰하며 근육의 움직임과 마음까지 읽으려 했습니다. 또한 민족학교 오산학교에서 받은 민족의식과 결합되어, 소는 억압받은 민족의 저항정신과 생명력을 상징하는 소재가 되었습니다.
Q. 이중섭의 작품은 현재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A. 이중섭의 작품은 제주 이중섭미술관, 서울미술관(유니온제약 안병광 회장이 설립),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소장·전시하고 있습니다. 제주 서귀포에는 이중섭이 가족과 머물던 한 평 남짓한 집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곳 벽에는 그의 자작시 '소의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마사코가 기증한 팔레트도 제주 이중섭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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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대를 그린 화가 이중섭의 소와 아이 / 유튜브 채널: https://www.youtube.com/watch?v=be20VZek4x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