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북도 익산은 백제 후반기의 중요한 정치·종교 중심지로 알려져 있으며,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쌍릉 등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유적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익산의 백제 문화는 단순한 유물·유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구전되는 다양한 설화와 민담 속에도 백제인의 삶, 감정, 가치관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익산에 전해지는 대표적인 백제 설화들을 중심으로, 이들이 오늘날 지역 문화와 정체성, 교육 콘텐츠로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미륵사지와 선화공주, 백제 무왕의 신화적 이야기
익산을 대표하는 백제 유적 중 단연 으뜸은 미륵사지입니다. 백제 무왕이 창건한 이 사찰은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절터로, 백제 불교문화의 절정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웅장한 절터에는 단순히 불교 신앙을 넘어선 왕실 로맨스와 국가 재건의 염원이 담긴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익히 알려진 <서동요>에서 비롯됩니다. 백제 무왕의 젊은 시절 이름인 ‘서동’은 마를 캐며 살던 평민이었지만, 선화공주와의 인연을 계기로 왕위에 오릅니다. 전설에 따르면, 서동은 아이들에게 “선화공주님은 서동을 밤마다 몰래 만나러 갑니다”라는 이상한 노래를 부르게 했고, 결국 소문이 퍼져 선화공주는 신라에서 쫓겨나듯 백제로 와서 서동과 결혼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익산에 자리 잡고 백제 부흥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힘을 모으게 됩니다.
그 중심에 지어진 사찰이 바로 미륵사입니다. 설화에 따르면, 선화공주가 병이 들자 무왕은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며 석탑을 쌓았고, 공주의 병이 나은 후 사찰을 완공하며 국가의 평안과 국민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이 석탑은 실제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미륵사지 석탑이며,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구조의 안정성과 역사성을 인정받아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설화는 단순히 왕과 왕비의 사랑 이야기를 넘어, 백제의 민중정서와 신앙, 왕권 강화의 의지를 상징합니다. 무왕은 익산을 제2의 수도로 삼고 백제의 재도약을 꿈꿨으며, 이 설화는 그 열망을 문화적으로 상징화한 결과입니다. 오늘날 익산시는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양한 역사체험 교육을 진행하며, 지역 축제에서도 ‘서동과 선화’ 퍼레이드가 주요 콘텐츠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쌍릉을 둘러싼 천자의 꿈과 풍수 이야기
익산 쌍릉은 두 개의 커다란 고분이 나란히 서 있는 백제 후기 왕실의 무덤으로, 백제 무왕과 그의 왕후의 능으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 유적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신비로운 전설과 풍수 설화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무왕은 어느 날 밤 이상한 꿈을 꿉니다. 그의 꿈에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아들을 가리키며 “이 아이는 훗날 천자가 될 운명을 지녔다”고 말한 후 사라졌다고 합니다. 무왕은 이 꿈을 계시로 받아들여, 익산을 백제의 새로운 중심지로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후 아들과 왕후를 이곳에 묻어, 백제의 명맥이 이 땅에서 계속되기를 염원합니다.
또한 쌍릉은 풍수지리적으로도 매우 길한 땅이라 하여 예부터 익산 지역에서는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기도와 제사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실제로 조선 후기까지도 이 고분 근처에 가묘를 세우고 조상을 모시는 풍습이 이어졌으며, 고을 원님이 직접 이곳을 참배하고 행차를 했다는 기록도 존재합니다.
또 하나의 민담으로는, 쌍릉의 왕자 무덤에서 밤마다 은은한 빛이 새어나왔고, 이를 본 마을 주민들이 “왕자의 영혼이 아직도 나라를 지키고 있다”며 매년 봄 제사를 올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런 전승은 쌍릉을 단순한 역사적 유물이 아닌, 살아 있는 신성한 장소로 인식하게 만든 요소입니다.
현재 쌍릉은 사적 제8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최근 문화재청과 익산시가 함께 복원 사업을 진행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쌍릉 설화를 바탕으로 한 지역 소설, 그림책, 애니메이션 제작도 추진 중이며, 익산의 문화 콘텐츠 산업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용화산 장군과 충절의 맹세: 전쟁과 정신의 민담
익산 북부에 위치한 용화산은 한적하고 조용한 산세로 알려져 있지만, 그 안에는 백제의 마지막 숨결을 지키고자 했던 장군의 충절 설화가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산은 백제 말기 전략적 군사 요충지로 활용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산세가 험하고 웅장하여 많은 이들이 명당이라 부릅니다.
설화에 따르면, 백제의 패망이 임박했을 무렵 한 충신 장군이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용화산에 진을 치고 신라군과의 마지막 전투를 벌입니다. 그는 “나라가 망하더라도 의리는 남아야 한다”며 병사들에게 끝까지 싸울 것을 독려했고, 결국 전원 전사했지만 그 충절은 백성들의 마음을 울렸다고 합니다.
이 장군이 마지막으로 외쳤다는 말, “이 땅은 반드시 다시 일어설 것이다!”는 오늘날까지도 지역 어르신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문구입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이 장군을 위해 용화산 자락에 비석을 세우고, 매년 정월 대보름 무렵에 장군제를 지내며 나라 사랑과 충성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현대에 들어서 이 이야기는 지역 학교의 역사·도덕 통합 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지역 청소년 문화동아리에서는 이 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 ‘용화산의 맹세’를 매년 공연하고 있습니다. 또한 익산시는 장군 설화에 영감을 받아 ‘용화산 충절 탐방길’을 조성하여, 역사 교육과 힐링 관광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문화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익산의 백제 설화는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닙니다. 미륵사지의 신화, 쌍릉의 꿈, 용화산의 충절 설화 등은 모두 백제인의 신앙, 정치, 감정이 응축된 생생한 지역유산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세대를 넘어 지역민들에게 계승되며, 교육·관광·예술 분야에서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백제의 유적을 돌아보며 느끼는 감동은 단지 구조물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인간의 삶, 믿음, 갈등과 희망이 설화라는 형식으로 전해지기에 우리는 더 깊이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습니다. 익산의 민담은 기록보다 더 진한 역사이며, 이 설화를 통해 지역 문화의 뿌리를 이해하고 미래로 연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익산을 방문하게 된다면, 단지 유적을 보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백제의 이야기를 꼭 함께 들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