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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이야기 (광복군, 사상계, 재야의 대통령)

by gohappyjan 2026. 4. 2.

사상계 표지
사상계 표지

재야의 대통령이라 불린 사람, 그는 정말 권력 밖에서도 정치를 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장준하라는 인물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도권 권력도 없이 어떻게 한 시대를 움직였을까 하는 의문이었죠. 일제강점기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했고, 해방 후에는 『사상계』를 통해 지식인 담론을 이끌며 독재에 맞섰던 그의 삶은 도덕적 권위만으로도 시대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과 제도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지 우리에게 묻고 있기도 합니다.

광복군이 되기 위한 6000리 대장정, 그 선택의 무게

장준하는 왜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했을까요? 1944년 일본의 징집령이 떨어졌을 때, 조선인 유학생들의 선택은 제각각이었습니다. 문익환 목사는 만주로 돌아갔고, 윤동주는 폭동을 모의하다 체포되어 생체 실험 끝에 광복 직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장준하의 선택이 얼마나 치밀했는지 다시 보게 됩니다.

장준하는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이자 하숙집 딸이었던 김희숙과 결혼해 그녀를 근로정신대에서 구해낸 뒤, 스스로 일본군에 자원입대했습니다. 여기서 근로정신대(勤勞挺身隊)란 일제가 전쟁 물자 생산을 위해 조선인 여성을 강제 동원한 노동 조직을 말합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그는 최전방 배치를 자원해 중국 서주의 츠카타 부대로 보내졌고, 1944년 7월 동료 3명과 함께 탈출에 성공합니다. 이후 약 6000리에 달하는 대장정 끝에 충칭 임시정부에 도착해 광복군이 되었죠.

제가 주목한 건 그가 부인에게 남긴 암호입니다. 편지 끝에 성경 구절이 나오면 그것이 탈출 신호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로마서 9장 3절)"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치밀함과 결연함은 그의 이후 삶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였습니다.

광복군 시절 장준하는 국내진공작전인 독수리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훈련받았습니다. 이범석 장군이 그를 작전에서 빼려 하자 삭발까지 하며 의지를 보였지만, 결국 작전은 일본의 항복으로 취소되었습니다. 1945년 11월 23일, 그는 김구 선생의 개인 비서 자격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습니다.

권력에 맞선 강력한 펜, 사상계는 어떻게 시대를 움직였나

해방 후 장준하는 왜 목사의 길 대신 잡지 발간을 택했을까요? 저는 이 선택이 그의 현실 감각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1953년 4월, 그는 문교부 산하 기간지였던 '사상'을 인수해 『사상계』를 창간했습니다. 여기서 기간지(機關紙)란 특정 조직이나 단체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정기 간행물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장준하의 사상계는 단순한 기관지가 아니었습니다.

창간 초기 발행 부수는 1000부에 불과했습니다. 장준하와 부인이 직접 리어카에 실어 서점에 배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55년 10,000부, 1958년 백지 권두언 사건 이후 100,000부로 폭발적으로 증가했죠. 제가 실제로 당시 사상계 글을 읽어보니, 그 영향력이 왜 그토록 컸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1958년 함석헌 선생이 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6.25를 "꼭두각시놀음"이라 비판하며 이승만 정부를 정면으로 겨냥했습니다. "형제 싸움에 서로 이겼노라니 정말은 진 것이 아닌가?"라는 구절은 전쟁의 본질을 꿰뚫었습니다. 이 글로 장준하와 함석헌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초를 겪었지만, 같은 해 국회에 무술 경관이 난입해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강행 통과시키자 장준하는 그 달 사상계 권두언에 백지를 실었습니다. 제목은 "무엇을 말하랴"였죠.

사상계의 영향력이 커지자 정부는 노골적인 탄압에 나섰습니다. 반품 사태 조장, 부패 언론인 누명 씌우기, 세무조사, 광고주 압박 등이 이어졌습니다. 장준하는 추징금을 내기 위해 유일한 집을 처분했고, 이후 단 한 번도 집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럼에도 그는 1962년 동양의 노벨평화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언론출판 부문을 수상하며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4.19 혁명은 사상계가 키운 학생들의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장준하의 진짜 힘이 무엇이었는지 봅니다. 그것은 직접적인 조직력이 아니라 의식의 변화였습니다. 해방 후 의무교육을 받은 첫 세대 학생들이 사상계를 통해 비판적 사고를 익혔고, 그것이 혁명의 동력이 되었던 겁니다.

사상계가 다룬 주요 주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민족 통일 문제와 반공 이데올로ギ 비판
  • 민주 사상 함양과 시민 의식 계몽
  • 경제 발전 방향과 재벌 비리 폭로
  • 문화 창조와 민족적 자존감 회복

재야의 대통령, 그는 정말 현실 정치를 바꿨을까

장준하는 왜 제도권 정치에 뛰어들었을까요? 5.16 쿠데타 직후 그는 "불가피한 일"이라며 옹호했습니다. 하지만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가 세력을 확대하고 헌법 효력을 중지시키자 태도를 바꿨습니다. 여기서 국가재건최고회의란 5.16 쿠데타 이후 군부가 설치한 최고 권력 기구로, 입법·사법·행정을 모두 장악한 초헌법적 조직을 말합니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 규탄 대회에서 장준하는 박정희를 "밀수 왕초"라 부르며 과거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출신임을 폭로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가원수 모독죄로 투옥되었지만, 감옥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습니다. 부인이 바구니에 사탕을 담아 선거 운동을 대신했고, 사람들은 "가시오, 가시오(걱정 말고 가세요)"라며 응원했죠.

국회의원이 된 장준하는 모두가 기피하는 국방위원회 상임위원을 맡았습니다. 월남 파병에 반대했지만 파병이 결정되자 자신의 아들을 가장 먼저 보냈습니다. 그리고 직접 월남으로 건너가 급식 비리를 파헤치고 전방 사병들의 겨울 군복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월남 파병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장준하가 대통령에 출마하면 맨발로 뛰어다니며 선거 운동하고 싶다"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1972년 유신헌법(維新憲法) 공포 이후 장준하의 투쟁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유신헌법이란 대통령 간접선거, 국회의원 3분의 2 추천권, 긴급조치권 부여, 중임 제한 폐지 등 영구 집권을 가능케 한 헌법을 말합니다. 장준하는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벌여 10일 만에 30만 명의 서명을 받았습니다. 결국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 형을 선고받았고, 11개월 만에 건강 악화로 석방되었습니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습니다. 14.7m 높이 경사 70도 암벽에서 추락했다고 발표되었지만, 시신에 타박상이 거의 없었고 안경과 시계가 멀쩡했습니다. 2012년 수해로 무덤이 훼손되어 이장 과정에서 두개골에 6~7cm 함몰 흔적이 발견되었고, 서울대 의대 이정빈 명예교수는 "외부 가격에 의한 즉사 후 추락"이라고 판정했습니다. 37년 만에 스스로 진실을 밝힌 셈이었습니다.

장준하는 재야의 대통령이었을까, 아니면 현실 정치와 긴장한 이상주의자였을까요? 저는 그가 둘 다였다고 봅니다. 그는 도덕적 권위로 시대를 움직였지만,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1999년 금관문화훈장, 2014년 긴급조치 위반 무죄 판결, 2020년 국가 배상 7억 8천만 원판결까지, 그의 명예 회복에는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만약 그가 제도권 정치에 더 깊이 참여했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궤적은 달라졌을지 궁금합니다. 그의 삶은 권력 밖에서도 정치가 가능함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상과 제도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일깨웁니다.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투쟁하겠다"던 그의 다짐은 지금 우리에게 묻습니다. 후손 앞에 당당한 조상이 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xixl5MU3L1s&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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