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한 건축가가 조선인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건축왕으로 불린 정세권 선생은 전통 한옥을 도시 환경에 맞게 혁신하여 창신동, 익선동, 개동 일대에 수백 채의 도시형 한옥을 건립했습니다. 그의 한옥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문화적 저항이었으며, 할부 판매 제도를 통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조선인들에게 내 집 마련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오늘날 북촌과 익선동에 남아있는 한옥 마을은 그의 혜안이 만들어낸 유산입니다.
도시형 한옥의 건축혁명, 전통과 실용의 결합
정세권 선생이 만든 도시형 한옥은 한옥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혁신 그 자체였습니다. 1929년 2월부터 3월 사이 한 달 남짓한 동안 창신동에 무려 37채의 도시형 한옥을 건립했던 기록은 그의 건축 역량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당시 일부에서는 정세관 선생의 도시형 한옥에 대해서 우리나라 전통 한옥의 전통을 해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세관 선생은 우리 전통 한옥을 축소하면서 생활하기에는 훨씬 편리한 도시형 한옥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의 고민은 깊었습니다. 그는 도시형 한옥의 주택이 가져야 되는 요건들을 명확히 제시했습니다. 위생적이면서도 햇볕을 잘 받아 공기 순환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 실용적이면서도 견고하고 사용이 편리해야 된다는 것, 그리고 건축비가 비교적 경감되면서도 유지의 비용이 적게 들어야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도시 한옥 주택 설계를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전통 한옥의 건축 비용이 비싼 것은 큰 대들보와 긴 석가래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들보를 가늘게 하고 석가래의 길이를 줄였습니다. 그리고 한옥들을 한꺼번에 건축을 하면서 이 대들보와 석가래의 규격을 표준화한 것입니다. 그러면 대량으로 만들 수 있고 자재비를 낮출 수 있었습니다. 도시형 한옥에는 막 끝을 함석으로 이어 붙였습니다. 그렇게 햇볕을 조절할 수도 있고 이 함석으로 비바람을 차단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 함석을 통해서 빗물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가게도 할 수 있었죠. 이 함석이라는 것은 빗물에도 녹슬지 않는 자재였습니다.
그리고 한옥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입식 부엌과 함께 부엌과 화장실을 실내로 들였습니다. 한옥의 문에 창호지를 바르던 것을 유리문으로 바꾸고 부엌에는 타일을 사용하고 전기와 상하 수도를 도입하면서 훨씬 편의성을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부엌은 북향으로 배치하지만 마루와 방들은 남향으로 배치를 했습니다. 그리고 방의 위치들을 조금씩 높여서 습기가 올라오는 것을 방지했습니다. 한옥의 규모는 훨씬 축소되었지만 이러한 한옥에서도 아름다운 창화와 함께 한옥만의 하늘을 볼 수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도시형 한옥의 지붕들을 보면 놀랍게도 우리 한글의 기역, 니은, 디귿, 미음 자형을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도시형 한옥의 모습을 구조화시킨 이 모습을 보면 한글의 자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가 단순히 주거 공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조선의 정체성과 한글 보존이라는 민족적 가치를 건축에 담아내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도시형 한옥은 전통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게 전통을 재해석한 창조적 계승이었습니다.
조선인을 위한 할부판매 제도, 내 집 마련의 기회
정세관 선생은 경성 편람이라는 책에 건축계로 본 경성이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글을 보면 도시형 한옥을 통해서 그가 추구하는 주택에 대한 건축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건축비와 유지비, 생활비 등의 절약의 유의함이 본사의 사명이다. 재래식의 황방과 장독대 참고의 위치를 특별히 개량하고 중류 이하의 계층들을 구제하기 위해 연부, 월부의 판매 제도까지 강구하여 주택에 대해 다수의 공급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은 조선인들을 위해서 집을 연부, 월부로 할부 판매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조선인들은 경제적으로도 여건이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용도가 낮다는 이유로 은행 대출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런 조선인들을 위해서 이렇게 할부 판매 제도까지 실시했던 것입니다.
1930년대 조선인들의 경제 상황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1922년만 해도 서른 칸 안팎 되는 집이 무난히 팔리던 때였는데 그래도 오늘날 신문지상에서 나타나는 생활난의 부르짖음은 적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르는 곳마다 들리는 건 생활난의 비참한 절규가 아닌가? 가옥 매매도 겨우 대여섯 칸에 집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아 열 칸 내외의 집이 매매될 뿐 그 이상의 집을 찾는 이가 적다"라고 합니다.
주택 매매가 침체되자 그는 도시형 한옥 분양을 위해서 광고를 신문에 싣기도 했습니다. 건양사가 내건 첫 광고는 조선일보에 1929년 2월에 실린 광고였습니다. 관철동, 낙원동, 관운동, 소격동, 그리고 봉익동과 제동에는 꽤 많은 주택을 판다고 공지하고 있습니다. 붉은색 표시를 보면 창신동 651번지에 1,157평 되는 이 땅을 분할 판매하겠다고 공지를 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1929년 3월 24일자 광고에 보면 창신동 651번지에 도시형 한옥 37채를 판매한다고 광고를 싣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옥 판매 광고를 통해서 유추를 해 본다면 1929년 한 해 동안 그가 만든 도시형 한옥이 무려 170 여체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개동, 익선동, 창신동 등의 도시형 한옥들을 판매한다는 광고를 지속적으로 실었습니다.
그는 토지를 매입해서 한옥을 건축하고 분양을 하고 할부 판매 그리고 임대까지, 그리고 이러한 부동산을 중개하고 대부를 해 주는 금융에 이르기까지 그가 운영한 건양사는 이 모든 과정을 모두 도맡아 한 회사였습니다. 오늘날의 종합 부동산 개발 시스템을 일제강점기에 이미 구축했던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사업가적 수완을 넘어 조선인의 주거 안정과 경제적 자립을 돕고자 한 민족적 사명감의 발로였습니다.
독립운동가 정세권, 건축왕이 선택한 민족의 길
실제로 그 당시 정세권 선생을 일컬어 많은 사람들은 건축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정세권 선생뿐만 아니라 당시에 이렇게 불리던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화신백화점을 운영하던 박흥식은 유통왕이라고 불렸고, 최창학은 광산왕이라고 불렸습니다. 하지만 유통왕 박흥식은 반민특위 때 가장 먼저 체포된 친일 인사였고, 최창학 역시도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막대한 전쟁 물자를 헌납한 친일 인사였습니다.
하지만 건축왕 정세권은 달랐습니다. 정세관 선생은 우리 것 우리 글을 지키기 위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경제적 성공을 거둔 많은 조선인 사업가들이 일제에 협력하며 부를 축적한 것과 달리, 정세권은 자신의 재산과 지위를 민족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가 건축한 한옥들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조선의 전통과 정체성을 지키는 문화적 보루였습니다.
그의 선택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정세권은 일제강점기 속에서도 한옥을 지키고 확장한 인물로 깊은 공감을 줍니다. 도시형 한옥을 통해 주거의 현실성과 전통의 가치를 동시에 살리려 했던 시도는 단순한 건축을 넘어 문화적 저항이었습니다. 특히 북촌 일대에 조성된 한옥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일상 속에 남기려는 의지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이 주로 중산층 이상을 위한 주거에 머물렀다는 점에서는 비판의 여지도 있습니다. 20평에서 50평대의 도시형 한옥은 할부 판매 제도가 있었다 해도 여전히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을 것입니다. 도시 서민의 주거 문제까지 포괄하지 못한 한계는 분명 존재합니다.
또한 전통 보존과 근대 도시 개발 사이에서 한옥은 과연 지속 가능한 해법이었는지도 질문하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조선인들을 위해서 식구가 많지 않은 경우에는 입구에 방 하나를 하숙을 칠 수 있도록 구조화해 조선인들이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게 한 모습은 현실적 배려였지만, 동시에 주거 빈곤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정세권의 한옥은 민족을 위한 공간이었을까, 시대가 허락한 최선의 타협이었을까. 그의 선택은 오늘의 도시와 전통 논의 속에서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습니다.
정세권이라는 한 건축가의 삶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선택할 수 있었던 저항의 한 형태를 보여줍니다. 그는 건축이라는 자신의 전문 분야를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조선인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오늘날 서울 곳곳에 남아있는 한옥 마을은 그의 혜안과 민족애가 만들어낸 살아있는 유산입니다. 비록 완벽한 해법은 아니었을지라도, 그가 남긴 도시형 한옥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소중한 실험이었습니다. 정세권의 건축 철학과 민족적 헌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전통을 어떻게 계승하고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4nTnx4NHF9M&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