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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의 위대함 (기록의 가치, 편찬 방식, 보존의 역사)

by gohappyjan 2026. 2. 15.

국가기록원
국가기록원

 

조선왕조실록은 470년간의 역사를 담은 세계기록유산입니다. 1997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 방대한 기록물은 단순한 역사서를 넘어 권력과 기록의 관계를 성찰하게 하는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왕조차 볼 수 없었던 비밀 역사서, 사관의 목숨을 건 기록 정신, 그리고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지켜낸 보존의 노력은 조선왕조실록이 왜 위대한지를 보여줍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가치와 세계적 위상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총 1893권 888 책으로 구성된 방대한 역사서입니다. 이 실록을 모두 쌓으면 아파트 12층 높이를 넘고, 하루 100쪽씩 읽어도 4년이 넘게 걸릴 정도의 분량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의 크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책 사이즈가 아니라 훨씬 큰 규격으로 제작되었습니다. 6400만 자에 달하는 이 기록은 명나라 실록(1600만 자)의 4배에 달하는 양입니다. 유네스코는 1997년 훈민정음과 함께 조선왕조실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했습니다. 2017년까지 우리나라가 보유한 세계기록유산은 총 15건으로 아시아 1위, 세계 4위의 기록을 자랑합니다. 유네스코가 조선왕조실록의 가치를 인정한 기준은 명확합니다. 470년간의 역사를 수록한 방대한 실록이며, 풍부하고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백과사전적인 기록물입니다. 또한 역사 기술의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고, 한국의 높은 수준의 인쇄 문화를 보여주며, 가장 완전하게 보존되어 동아시아 역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단순히 왕과 권력자의 이야기만 담은 것이 아닙니다. 평안도 지역의 박복동이라는 사람과 강아지가 벼락을 맞았다는 기사, 함경도의 굶주린 백성들이 흙을 파서 떡을 지어먹었는데 그 맛이 메밀 음식과 비슷했다는 기록, 경상도의 한 노비가 세 쌍둥이를 낳았는데 두 아이가 죽고 한 명만 살아남았을 때 상을 줘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까지 담고 있습니다. 장금에 대한 십여 차례의 기록, 공길이 연산군 앞에서 논어를 인용해 불경죄로 유배 간 이야기 등 다양한 계층의 삶이 실록에 녹아 있습니다.

국가 실록 권수 글자 수 특징
조선 1893권 6400만 자 당대 기록 완전 보존
명나라 2964권 1600만 자 대부분 소실
청나라 4404권 - 만주어·몽골어·한자 혼용, 삽화 포함

그러나 실록 역시 완전한 객관의 산물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기록자는 특정 시대의 가치와 언어 안에서 판단했고, 사관의 시선 또한 성리학적 질서와 관료적 이해관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패자의 목소리, 여성과 하층민의 삶은 제한적으로 반영되었고, 권력 중심의 사건이 서술의 중심을 차지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실록은 권력의 순간들을 숨김없이 남기려 했다는 점에서 깊은 공감을 줍니다.

왕도 볼 수 없었던 실록의 편찬 방식

조선왕조실록의 가장 큰 특징은 왕조차도 볼 수 없는 비밀 역사서였다는 점입니다. 태조 7년,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의 사초를 모두 가져오라"는 불호령에 사관 신개는 "창업한 군주는 자손들의 모범이 됩니다. 전하께서 당대의 역사를 살펴보시게 되면 뒤를 잇는 임금들은 반드시 이를 구실로 삼아 실록을 보는 것을 일상적인 일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그리되면 역사를 기록하는 신하로서 누가 감히 집필을 할 수 있겠나이까"라고 반대했습니다. 결국 태조는 사초를 보겠다는 명을 거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군으로 평가받는 세종 역시 아버지 태종의 실록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태종은 정말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일으켰던 왕이었고, 세종은 아버지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었을지 무척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하의 만류에 "태종실록을 만든 사람이 아직 살아 있는데 임금이 이것을 보시고자 하면 어찌 실록을 공정히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듣고 실록을 보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세종은 나아가 "다른 왕들 역시도 실록을 보지 않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왕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국조보감이라는 책을 만들었는데, 이는 실록을 편찬하고 나서 선왕의 좋은 업적들만 추려서 왕에게 귀감을 삼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사관의 기록은 객관적 사실뿐만 아니라 주관적 견해까지 담았습니다. '사신왈(사신은 논한다)'로 시작하는 문장에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사관의 주관적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정태제의 사초에는 "백성의 민생고 해결이 급선무라고 대신들이 아뢰어도 머뭇거리는 것은 왕의 자세가 아니다"라며 인조를 비판한 내용이 있습니다. 또 다른 실록에는 "충청도 관찰사 김여석이 바닷조개 백 개를 바쳤다"는 기록 뒤에 "김여석은 성품이 본래 간사하고 아첨하여 임금에게 사랑을 받고 기쁨을 사는 일을 하지 아니함이 없었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관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자격 요건이 필요했습니다. 정 7품 이하 8명으로 구성된 전임 사관은 문과 시험에 높은 성적으로 급제한 자이며, 재주나 학문이나 식견을 두루 갖춘 자여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가와 외가 4대조를 모두 조사해서 결격 사유가 없는 자여야 했기에,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사관이 될 수 없었습니다. 사관으로 임명되면 향을 피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하늘 아래 부끄럼 없는 역사를 기록하겠다는 소명 의식을 다짐했습니다. 세종 때부터 사관을 2명을 두었는데, 좌사관은 왕의 행동을, 우사관은 왕의 말을 기록했습니다. 사관들은 늘 왕의 측근에 머물러야 했기에 왕 입장에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사관은 왕의 기피 대상 1호였고, 처우는 좋지 못했습니다. 사관이 책상을 가지고 기록할 수 있게 된 것은 조선 건국 후 100년이 지나서였으며, 그전에는 왕을 따라다니면서 몰래 기록하거나 엎드려서 기록해야 했습니다. 태종은 사관 민인생에게 "이곳은 내가 편히 쉬는 곳이니 들어오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며 입궐을 금지했지만, 민인생은 경연 때 병풍 뒤에서 몰래 엿듣고 사냥 때는 얼굴을 가리고 쫓아다녔습니다. 결국 민인생은 왕 앞에 예를 갖추지 못했다 해서 유배 보내졌습니다. 태종이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에서 떨어진 사건도 실록에 기록되었습니다. 태종은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라고 했지만, 실록에는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라고 있는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선조실록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2가지로 편찬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25년간의 사초가 사라져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광해군 때 북인에 의해 편찬된 선조실록을 인조반정 후 서인이 수정했습니다. 그러나 서인들은 선조실록을 폐기하지 않고 두 실록을 모두 보존하며 평가는 후대에 맡겼습니다.

실록 보존을 위한 과학적 노력과 위기 극복의 역사

조선왕조실록의 보존에는 과학적 방법이 적용되었습니다. 4대 사고 중 전주사고의 모습을 보면 지붕의 처마가 굉장히 길게 나와 있어 햇볕을 차단하고 비와 눈으로부터 사고를 보호했습니다. 창문은 이중창으로 되어 있어 환기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실록은 오동나무로 만든 상자에 12~13권씩 담아 붉은색 보자기로 싸서 보관했습니다. 오동나무는 방습과 방충에 효과적이며 시간이 지나도 잘 틀어지지 않았습니다. 실록과 함께 천궁과 창포를 담아 넣어 방충과 방습 효과를 높였습니다. 3년에 한 번씩 사관이 직접 내려와 사고의 문을 열고 실록들을 모두 꺼내어 햇볕에 말리고 바람을 쐬이는 포쇄 작업을 했습니다. 조선 500년 동안 실록은 수많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 전주사고 4곳에 실록을 보관했습니다. 세종 때 성주사고와 전주사고를 추가로 설치했는데, 임진왜란 때 성주사고, 충주사고, 춘추관은 모두 불태워졌습니다. 마지막 남은 전주사고도 일본군이 전라도로 세력을 넓히면서 위험해졌습니다. 전주사고 참봉은 손홍록과 안의라는 유생에게 부탁해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 실록 804권 614 책을 정읍 내장산 깊숙한 곳으로 옮겼습니다. 손홍록과 안의는 실록을 지키기 위해 1년 넘게 불침번을 섰습니다. 임계기사에 따르면 안의가 혼자 숙직한 날이 174일, 손홍록이 혼자 숙직한 날이 143일, 두 사람이 함께 숙직한 날이 53일로 총 370일을 밤새워 지켰습니다. 당시 손홍록의 나이는 56세, 안의는 64세였습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조선왕조실록의 절반은 불완전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전주사고의 실록을 토대로 복본을 만들어 춘추관, 묘향산, 마니산, 오대산, 태백산 5곳에 분산 보존했습니다. 인조 때 이괄의 난으로 춘추관 사고가 불타고, 후금의 성장으로 묘향산사고를 무주의 적상산으로, 병자호란으로 마니산사고를 강화도의 정족산으로 옮겼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적상산사고, 정족산사고, 태백산사고의 실록을 경성대학으로, 오대산사고의 실록을 도쿄대학으로 가져갔습니다.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서울이 위험해지자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은 문교부 장관과 유엔군 대위에게 도움을 요청해 정족산사고본과 태백산사고본을 부산으로 대피시켰습니다. 적상산사고본은 북한이 가져갔고, 2006년 도쿄대학이 보유한 47 책의 오대산사고본이 돌아와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한반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사고본 현재 보관처 비고
적상산사고본 평양 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정족산사고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
태백산사고본 국가기록원(부산) 만일에 대비
오대산사고본 - 2006년 47책 환수

현재 조선왕조실록은 국민 실록이 되었습니다. 1968년부터 1993년까지 세종대왕 기념사업회에서 연간 3000명의 학자들이 25년간 매달려 조선왕조실록을 한글로 모두 번역했습니다. 이 방대한 자료들이 전산화되어 우리는 컴퓨터에서 조선왕조실록 어디든 마음대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록은 과연 진실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가, 아니면 시대의 틀 속에서 재구성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은 단순한 역사 자료가 아니라 기록과 권력, 기억의 책임을 묻는 텍스트로 남아 있습니다. 연산군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역사뿐이다"라고 했고, 정조는 "실록은 만 년 후를 기다리는 책이다"라고 했습니다. 실록은 왕과 권력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장치였으며, 조선 이후 즉 현재 우리를 위해 남겨진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조선왕조가 500년 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권력자들이 조선왕조실록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나를 바른 길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두려움, 가족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고 자랑스러울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한 '외(畏)'가 필요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조선왕조실록은 왜 왕도 볼 수 없었나요?

A. 실록을 왕이 볼 수 있게 되면 사관들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할 수 없고, 왕의 눈치를 보며 역사를 왜곡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태조와 세종도 실록을 보려 했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포기했으며, 이후 왕들도 실록을 보지 않는 것이 원칙이 되었습니다.

 

Q. 사관은 어떻게 선발되었고 어떤 역할을 했나요?

A. 사관은 문과 시험에 높은 성적으로 급제하고 친가와 외가 4대조까지 결격 사유가 없는 자 중에서 선발되었습니다. 좌사관은 왕의 행동을, 우사관은 왕의 말을 기록했으며, 왕의 측근에서 모든 일을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 평가를 담아 기록했습니다.

 

Q. 조선왕조실록은 어떻게 보존되었나요?

A. 실록은 오동나무 상자에 천궁과 창포와 함께 담아 방습·방충 처리를 했고, 4대 사고에 분산 보관했습니다. 3년마다 포쇄 작업으로 햇볕에 말리고 바람을 쐬였으며, 임진왜란·한국전쟁 등 위기 때마다 목숨을 걸고 지킨 사람들 덕분에 현재까지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Q. 선조실록이 2개 버전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임진왜란으로 25년간의 사초가 소실되어 부실하게 편찬된 선조실록을 광해군 때 북인이 작성했고, 이후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이 선조수정실록을 새로 편찬했습니다. 하지만 서인은 이전 실록을 폐기하지 않고 두 실록을 모두 보존하여 후대가 판단하도록 했습니다.

 

Q. 현재 조선왕조실록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A. 적상산사고본은 평양에, 정족산사고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태백산사고본은 부산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1968년부터 1993년까지 한글 번역이 완료되었고, 현재는 전산화되어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열람할 수 있습니다.

 

--- [출처] 강선생의 친절한 역사이야기 - 조선왕조실록이 위대한 이유?: https://www.youtube.com/watch?v=l1tCi2jps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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