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여성의 이름 석 자가 역사에 남는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장계향이라는 이름은 '여중군자'라는 칭호와 함께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습니다.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장흥효의 딸이자, 동아시아 최초의 한글 요리서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인물로서, 장계향은 예술적 재능과 학문적 깊이, 그리고 실천적 삶을 통해 조선 사회의 한계를 조용히 넘어섰습니다. 그녀의 삶은 단순히 현모양처의 전형이 아니라, 지식과 나눔을 일상에서 구현한 사상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술과 효행: 시서화에 능한 딸의 선택
장계향은 임진왜란이 끝나가던 무렵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장흥효는 퇴계 이황의 제자인 김성일의 직계 제자이자, 류성룡과 정구에게도 학문을 배운 학자였습니다. 김성일은 장흥효를 두고 "경당은 꾸준하게 공부를 하니 뒷날 크게 이룰 것이다. 나는 늦게 태어난 사람 중에서 이 사람을 얻었도다"라고 극찬했습니다. 결혼한 지 18년 만에 어렵게 얻은 딸에게 장흥효는 '계수나무 향기'라는 뜻의 계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봄에 계수나무 향기가 집 안에 가득 퍼지듯이 평화로운 시기가 다가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이름이었습니다.
딸바보였던 장흥효는 딸이 영특하다는 것을 알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에게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딸에게 "독서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체득하여 실행하기 때문이니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책을 읽는 것과 책을 읽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라고 말하며 학문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장계향은 특히 시경에 관심이 많았고, 시를 짓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녀가 지은 학발시는 "새하얀 머리 되어 병에 지쳐 누웠는데 자식은 멀리 만 리 되는 수 자리에 같구나. 만 리 밖 수 자리에 내 아들 어느 달에 오려는가"라는 구절로 시작하는데, 국경을 지키러 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노모의 심정을 담아 당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장계향은 시뿐만 아니라 초서체로 글씨를 매우 잘 썼습니다. 당시 초서체로 일가견이 있던 정운목은 그녀의 글씨를 보고 "필 새가 호걸스럽고 굳센 것이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 같지 않다. 중국 사람의 초서체처럼 정말 잘 쓴 글씨다"라고 평가했고, 정조 때의 재상 채제공 역시 "여자 중에 이런 걸 쓸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라고 극찬했습니다. 열 살 무렵 그린 맹호도는 호랑이의 용맹함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 아이가 그린 그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장계향은 열다섯 살부터 시서화를 모두 그만두었습니다. 당시 사회적 통념에서 여자가 시를 짓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여자가 해야 할 본연의 일을 소홀히 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오세창은 『근역서화징』에서 "열 살 전후에 문예에 두루 통달하여 배우지 않아도 능했으니 그 읊조리는 시에 나타나고 붓 끝으로 써내는 것은 풍아의 체와 종요와 위부인의 법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문장과 글씨는 아녀자의 직분이 아니라고 하여 마침내 그만두고 하지 않았으니 아름다운 문장과 뛰어난 필적이 세상에 많이 전해지지 않았다"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열다섯 살부터 장계향은 신부 수업을 시작했고, 어머니 안동 권씨로부터 요리를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장계향에게 "음식의 재료가 되는 것은 모두 생명이 있는 것이기에 재료를 대할 때는 언제나 생명의 존귀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당부했습니다. 열아홉 살에 장계향은 아버지의 제자였던 이시명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이시명은 이미 결혼했다가 상처한 사람이었지만, 장흥효는 제자의 학문과 인품을 믿고 딸을 맡겼습니다. 당시 의병장 곽재우는 이시명을 두고 "고을의 자재들은 놀고 방탕함이 많은데 이 자재는 유독 그 몸을 지키기를 이같이 하니 범상한 선비는 아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시집간 후 장계향이 가장 신경 쓴 일은 남편의 전처가 남긴 딸과 아들을 잘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추운 날에는 아들을 업고 서당까지 데려다 주는 등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습니다.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무남독녀였던 장계향은 홀로 계신 아버지를 걱정하며 친정으로 가서 아버지를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재혼시켰는데, 새어머니는 장계향보다 열 살이나 어렸습니다. 장계향은 새어머니에게 살림살이를 가르쳐 드리며 친정에서 3년을 머물렀습니다. 3년 후 시댁으로 돌아온 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남편은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고, 그 와중에 친정아버지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장계향은 친정 새어머니와 의붓 동생들을 시댁이 있는 영덕으로 불러 함께 지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시명이 처가에 보여준 의리와 장계향의 효를 칭송했습니다.
| 시기 | 장계향의 행적 | 의미 |
|---|---|---|
| 10대 초반 | 시경 공부, 시서화 재능 발현 | 예술적 자질 증명 |
| 15세 | 시서화 중단, 신부 수업 시작 | 시대적 한계와 선택 |
| 19세 | 이시명에게 시집, 전처 자식 양육 | 효와 헌신의 시작 |
| 시집 후 | 친정 아버지 재혼 주선, 새어머니와 의붓동생 돌봄 | 상식을 넘어선 효행 |
그러나 '여중군자'라는 호칭 자체가 성별의 경계를 전제한 표현이라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습니다. 뛰어난 여성에게 남성적 덕목을 부여해 인정하는 방식은 당시 사회의 기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장계향의 삶이 덕행과 헌신의 상징으로만 소비될 때, 개인의 욕망이나 갈등은 가려지기 쉽습니다. 그녀가 열다섯 살에 시서화를 포기한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었을까요, 아니면 사회적 압력에 의한 것이었을까요. 이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음식디미방: 생활 지식의 체계화
장계향은 일흔세 살의 나이에 『음식디미방』을 저술했습니다. '디'는 '알 지(知)' 자로, 음식 맛을 내는 법, 음식 맛을 아는 법이라는 뜻입니다. 후손들이 앞표지를 덧붙이며 '규곤시의방'이라 했지만, 실제 책 제목은 음식디미방입니다. 이 책은 146가지의 음식을 만드는 방법과 재료를 보관하고 저장하는 방법을 담고 있으며, 그중 51가지는 술을 빚는 방법입니다. 양반가에서 술 빚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따르면 10년 간 3,841회의 손님을 접대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거의 매일 손님이 찾아왔다는 의미입니다. 술은 그 양반 가문의 얼굴이기도 했기에 장계향은 술 빚는 법을 많이 적어두었습니다.
『음식디미방』은 매우 과학적인 조리책입니다. 복숭아는 여름철 과일인데, 이를 겨울까지 보관하는 방법으로 "밀가루로 죽을 달이고 소금을 조금 넣어 새 독에 넣고 복숭아를 죽 가운데 넣어서 봉하면 겨울에 먹어도 제철 복숭아 같은 맛이 난다"고 기록했습니다. 전복은 "싱싱한 전복에 참기름을 발라서 단지에 가득 넣고 다시 참기름을 한 잔 부어두면 오래되어도 싱싱하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이 방법들은 재료 보관에 효과가 높았다고 합니다.
장계향은 후손들이 이 책을 곁에 두고 잘 활용하기를 바라며 매우 쉽게 글을 썼습니다. 다식법을 서술하며 "술을 조금 넣어서 만들면 아주 연하니라"라고 했고, 인절미 굽는 법을 소개하며 "인절미 속에 엿을 넣어두고 약한 불로 엿이 녹게 구워 아침으로 먹어라"라고 마치 말하듯 적었습니다. 이는 독자가 쉽게 받아들이고 실제로 실천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음식디미방』은 당시 여성들이 책을 쓰는 것이 금기시되던 사회적 통념을 깬 실학적 시도였습니다. 실제로 쓰이도록 책을 쓴 것이죠. 이 책은 최초의 한글 요리서이면서 17세기의 어법과 철자가 정확하게 남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고 있어, 당시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한글을 연구하는 자료로도 그 가치가 매우 큽니다. 장계향은 책 마지막에 "이 책을 이리 눈 어두운 데 간신히 썼으니 뜻을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가되 책을 가져갈 생각일랑 마음도 먹지 말며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하여 쉽게 떨어지게 하지 말라"라고 당부했습니다. 책을 쓴 저자가 이 책을 어떻게 후손에게 전하라고까지 당부를 남기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 항목 | 내용 | 특징 |
|---|---|---|
| 수록 음식 수 | 146가지 (술 51가지 포함) | 양반가 음식 문화 집대성 |
| 보관법 | 복숭아(밀가루죽+소금), 전복(참기름) | 과학적 저장 기술 |
| 문체 | 구어체, 쉬운 표현 | 실용성과 전승 목적 |
| 언어학적 가치 | 17세기 경북 북부 한글 연구 자료 | 어법과 어휘 보존 |
그러나 『음식디미방』이 지닌 창의성과 실험성보다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앞서는 해석은 장계향의 주체성을 축소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이문열의 소설 『선택』은 장계향이 시, 서, 화에 능했지만 결혼 후 며느리, 어머니, 부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다고 서술하며 여성의 가정 내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여성 단체들은 반발했고, 여성 학자들이 쓴 『조선의 여성들』이라는 책이 출간되어 조선 시대 여성들의 다양한 삶을 조명했습니다. 장계향이 열다섯 살에 예술 활동을 그만둔 것은 자발적 선택이었을까요, 아니면 강요된 순응이었을까요. 그녀의 기록은 여성의 역할을 확장한 성취였는지, 기존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한 선택이었는지 질문이 남습니다.
나눔의 실천: 백성을 살린 여인
장계향의 시아버지 이함은 과거에 급제했지만 관직보다는 영덕에서 제자를 길렀습니다. 그는 충효당이라는 편액을 걸고 제자들에게 "지고 살아라, 밑지고 살아라"라고 가르쳤습니다. 나눔을 실천하며 살기를 가르쳤고 당신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고 흉년이 들었을 때 이함은 사재를 털어 백성들을 구휼했지만, 창고를 다 털어도 모두를 도울 수는 없었습니다. 장계향은 도토리를 따서 도토리죽을 쑤어 백성들을 구휼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흉년이 들 때는 몇 달 동안 하루에 삼백 명씩 도토리죽을 쑤어 백성들을 구휼했습니다. 장계향이 두들마을로 오면서 제일 먼저 도토리나무를 심은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도토리나무는 흉년이 들수록 더 풍성하게 열린다고 합니다.
장계향은 "밥 빌러 온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유랑민들이 쌀과 죽을 얻으러 오면 모두 똑같은 그릇과 광주리에 나눠줬습니다. 유랑민들의 마음까지 배려한 모습입니다. 『정부인 장 씨 실기』에서는 장계향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부인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이미 풍부하였는데 배움까지 더하였으며 사람들을 사랑하고 측은하게 여겼고 착한 일을 즐거워하고 옳은 일을 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렇게 하기를 젊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일관되게 하였다. 노년에 이르러서 기력이 쇠약해져 생각처럼 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을 인도하여 착한 일을 하도록 하는 뜻만은 끝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장계향의 삶의 철학은 두들마을에 새겨진 낙기대에 담겨 있습니다. "초라한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아라, 궁핍함 속에서도 의를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장계향은 노비들에게도 각별했습니다. "너희들의 손끝에서 모든 것이 만들어지니 너희야말로 이 집의 주인이다"라고 말하며 노비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했습니다. 어린 노비들은 자신의 딸처럼 아꼈고, 노비가 병들면 직접 음식을 해서 간호했습니다. 노비들이 실수를 저지를 때도 잘 타일러 감화시켰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다른 집 노비들도 장계향의 집에 노비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장계향은 영양의 두들마을로 정착한 후 여러 차례 화재를 겪었고, 자식을 먼저 보내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남편 이시명은 더 깊은 오지로 들어가 '낙토'라고 이름 붙인 곳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의 삶은 더 궁핍했지만, 장계향은 손님 접대를 계속했습니다. 이시명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선비들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계향은 전처의 자식 2명과 친자식 6남 2녀를 포함해 총 10명의 자식을 길렀습니다. 자식들에게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 행동 하나를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하여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학문보다 바른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르침 덕분에 일곱 아들은 모두 뛰어난 학자가 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7현재라고 칭송했습니다. 셋째 아들 이현일은 이조판서에까지 올랐고, 장계향은 정부인이라는 관작을 받았습니다. 이현일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며 『정부인 장 씨 실기』를 저술해 어머니의 삶을 기록했습니다. 장계향의 아버지 장흥효는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제자였고, 장계향을 통해 그 학맥이 아들들에게 이어졌습니다. 장계향은 훌륭한 교육자였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살린 여인이었습니다.
2002년 장계향을 모시는 신주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신주는 불천위로서, 4대 조가 지나도 땅에 묻지 않고 영원히 보관하며 제사를 모시는 것입니다. 학문이 높거나 큰 공을 세운 사람의 신주만이 불천위가 됩니다. 신주 뒤편에 '안동 장씨 계향'이라는 이름이 확인되었습니다. 계수나무 계 자, 향기 향 자, 이렇게 이름 세 글자가 밝혀진 것입니다. 조선시대 여성의 이름이 이렇게 남는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장계향의 삶은 진정한 인간애를 나누고 실천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녀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장흥효로부터 배운 학문과 실천, 그리고 시아버지 이함으로부터 배운 나눔과 실천이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은 삶으로 말합니다. 장계향은 말이 아닌 삶으로 그 가치를 증명한 인물입니다.
장계향은 시대 안에서 최선을 다한 실천가였을까요, 아니면 제도 속에서 조용히 저항한 지식인이었을까요. 그녀의 삶은 덕행의 상징으로만 남길 것인지, 생활과 지식의 가치를 재정의한 사상가로 다시 읽어야 할지 여전히 질문이 남습니다. 오늘 우리는 장계향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음식디미방』을 통해 일상의 음식 문화를 기록하고 체계화한 점은 단순한 요리서가 아니라 생활 지식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여성의 공간으로 여겨지던 부엌을 지식과 실천의 장으로 끌어올린 선택은 시대의 한계를 조용히 넘어선 행위였습니다.
장계향의 삶을 통해 우리는 지식과 실천, 나눔과 배려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를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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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강혜영의 일상의 인문학 https://www.youtube.com/watch?v=KXWmYYPppp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