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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과거제 책문 (정치철학, 인재등용, 시험제도)

by gohappyjan 2026. 2. 11.

조선시대 과거시험
조선시대 과거시험

 

조선시대 과거 시험의 최종 관문인 책문은 단순한 지식 평가를 넘어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정치철학과 현실 인식을 확인하는 장이었습니다. 왕이 직접 시대적 과제를 묻고, 응시자들이 목숨을 걸고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이 제도는 조선 500년 문치주의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던지는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조선 왕들의 고민, 그리고 그에 답한 선비들의 혜안을 살펴보겠습니다.


책문에 담긴 정치철학과 시대정신


조선시대 과거 시험은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로 이루어졌으며, 최종 전시에서 왕이 직접 출제하는 책문이 치러졌습니다. 전국에서 240명이 초시를 통과하고, 그중 33명이 복시를 거쳐 최종 전시에 진출했습니다. 이 33명의 등수를 매기는 전시는 단순한 서열화가 아니라, 조선이 직면한 현안에 대한 해법을 경쟁하는 정책 제안의 장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어렸을 때는 새해가 오는 것을 다투어 기뻐했지만, 나이를 먹으면 모두 서글픈 마음이 든다. 섣달그믐 밤의 쓸쓸함, 그 까닭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에 대한 응시자의 대책은 "세월은 빨리 지나가고 나에게 머물러 있지 않으니, 죽을 때가 되어서도 남들에게 칭송받을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성인들은 경계했습니다. 살아서는 볼만한 것이 없고 죽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면 초목이 시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라는 답으로 광해군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임수경의 대담한 대책입니다. 광해군이 토지 문제, 세금 문제, 군제 운영 등을 물었을 때, 임수경은 "이런 문제들은 국가 기강을 세우고 의견 일치를 모아서 잘 운영해 가면 되는 문제입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외척 세력이나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들이 부정을 저지르는 문제, 인재를 공정하게 등용하지 않는 문제, 왕이 신하들의 쓴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문제입니다"라고 직언했습니다. 광해군은 격노하여 임수경의 이름을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하라 명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넉 달간의 대치 끝에 결국 복권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책문이 왕의 잘못까지 지적할 수 있는 용기 있는 글의 장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중종은 "나는 부족한 덕으로 다스린 지 십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나라의 기강과 법도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 그대가 만약 임금이라면 어떻게 만사를 다스리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조광조는 "전하께서는 도의 실현을 정책의 근본으로 삼고 마음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으십시오. 하늘의 이치로 백성을 인도해야 합니다. 임금이 하늘의 이치를 잘 관찰해서 그 도리에 따라 성실히 일을 행한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라고 답했습니다. 중종은 이 답안에 깊은 감명을 받아 조광조를 곁에 두고 개혁 정치를 함께 펼쳐나갔습니다.

책문 주제 핵심 질문
광해군 시대적 위기 극복 지금 이 나라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종 정치의 근본 그대가 만약 임금이라면 어떻게 만사를 다스리겠는가
명종 관료 개혁 6조의 관리들을 어떻게 개혁해야 되겠는가
세종 제도의 폐단 법이 제정되면 폐단도 함께 생기니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인재등용의 철학과 과거제의 실제

 

조선시대 500년간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약 14,80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800여 회의 과거 시험이 실시되었으나 합격자 수는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소과(생원·진사시)를 거쳐 대과(문과)에 응시하는 과정은 매우 험난했으며, 초시 240명, 복시 33명, 전시 33명의 등수 결정이라는 좁은 관문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명종은 "교육이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과 인재를 올바로 양성하는 방법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혀 보라"라고 물었습니다. 조정은 "학교 행정은 법과 제도가 확립되지 못한 게 문제가 아니라, 학문의 진리가 마음을 즐겁게 하지 못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지 않고 단지 과거 시험 문제만으로 선비를 뽑고 그에 따라 벼슬과 녹봉으로만 사람을 부린다면 어떻게 학교가 진흥될 수 있고 선비들의 기풍이 바르게 정립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했습니다.
과거 합격의 열망은 나이를 초월했습니다. 최연소 급제자는 17세의 박팽년이었고, 조선 전기 장원급제 평균 연령은 20대 후반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연령대가 높아져 평균 37세가 되었으며, 40대와 50대 합격자 비중도 상당했습니다. 놀랍게도 최고령 급제자는 철종 때 김재봉과 고종 때의 한 인물로, 두 분 모두 90세에 합격했습니다. 83세에 합격한 조우인은 "뱃속에 든 시와 책이 몇 백 권이던가, 오늘에야 가까스로 난산을 걸쳤네. 구경꾼들아 몇 살인가를 묻지 마소, 60년 전에는 스물셋이었다"라는 시로 감회를 표현했습니다.
양반 가문이라 할지라도 4대 이상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하면 양반 대접을 받지 못했기에, 과거 합격은 가문의 존속과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이황 선생도 24세에 연달아 세 번 낙방하여 과거에 연연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율곡 이이는 구도장원급제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그 과정에서 두 번이나 낙방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과거 시험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조선은 철저한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미리 응명이라는 곳에 원서를 접수한 사람만 입장시키고, 봇짐을 철저히 검사했습니다. 시험지에는 이름뿐 아니라 4대조 조상의 이름과 외조부까지 기재하게 했으며, 이 부분을 잘라내거나 풀칠로 봉하여 채점자가 응시자를 알 수 없게 했습니다. 더 나아가 답안지를 다른 사람이 베껴 쓴 사본(謄本)으로 채점하는 등 익명성을 철저히 보장했습니다.

 

시험제도에 드러난 정치적 갈등과 이상


세종은 "법이 제정되면 그에 따라 폐단도 함께 생기니 예나 지금이나 공통된 관심거리다. 고려 때의 문제를 거울삼아서 사병 확보의 이로움을 말하고, 의정부를 역할시켰더니 승정원의 권한이 크다고 또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이런 제도의 폐단을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을 말해보라"라고 물었습니다.
이 책문에 신숙주와 성삼문이라는 두 명의 인재가 답안을 제출했습니다. 신숙주는 "폐단이 없는 법이란 없습니다. 폐단을 극복하는 방법은 적합한 인재를 얻어서 그 인재에게 일을 맡기는 데 있습니다"라고 했고, 성삼문은 "마음은 정치의 근본이고 법은 정치의 도구일 뿐이다. 다스리는 사람이 바른 마음으로 정치를 한다면 법의 폐단은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반박했습니다.
또한 신숙주는 "신하를 믿고 권한을 맡기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공통된 일이다. 정치가 한계가 있어서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어야 된다"라고 했으나, 성삼문은 "정권은 군주의 큰 권한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남에게 맡겨져서는 안 된다"며 왕권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의정부 역할에 대해서도 신숙주는 강화를, 성삼문은 견제를 주장했습니다. 사병 문제에서도 신숙주는 찬성, 성삼문은 반대 입장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나란히 합격했지만, 이처럼 정치철학이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이후 두 사람의 운명을 완전히 갈라놓았습니다. 성삼문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 사육신으로 처형되었고, 신숙주는 세조를 섬기며 출세의 길을 걸었습니다. 어쩌면 이들의 엇갈린 운명은 이 책문에서 이미 예고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중종은 술의 폐단에 대해서도 책문을 냈습니다. "술에 빠져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술에 중독되어 품위를 망치는 사람도 있다. 흉년에 금주령을 내려도 몰래 술을 빚어서 곡식이 다 없어질 지경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에 김구는 "술은 법보다는 마음으로 금지해야 합니다. 술은 폐해도 크지만 쓰임새도 큽니다. 따라서 없앨 수도 없고 쓰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이 올바른 마음으로 모범을 보인다면 아래에 있는 사람도 마음을 바르게 세워서 습관을 변화시킬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김구는 술잔을 뜻하는 글자인 '觴(상)'과 '巵(치)'의 의미를 분석하며, "상찬은 '상하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고, 치찬은 '위태롭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옛사람들은 술잔에 이 글자를 새겨 경계했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제도나 처벌이 아닌 자기 성찰과 상층부의 솔선수범을 강조한 답안이었습니다.

구분 신숙주 성삼문
법의 폐단 해결 적합한 인재 등용 다스리는 사람의 바른 마음
왕권과 신권 조화와 균형 왕권 우선
의정부 역할 강화 필요 견제 필요
사병 문제 찬성 반대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과거 시험은 공정성을 잃어갔습니다. 시험장은 '난장판'이라 불렸고, 이 말이 바로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김홍도의 그림에 묘사된 시험장에는 실제 응시자 외에도 대필자인 '거벽', 대신 글을 쓰는 '대서', 자리를 잡는 '수종', '선척', '노유' 등 여러 사람이 동원되었습니다. 전날 밤부터 대기했다가 시험장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가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답안지가 길게는 12m에 달했기에, 먼저 제출해야 제대로 채점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책문은 왕이 자신을 낮추고 경청하는 자세와, 응시자들이 목숨을 걸고 소신을 펴는 용기가 공존하는 장이었습니다. 왕의 질문은 곧 조선의 질문이었고, 그 질문은 지금 우리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인재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외교관은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하는가, 나라를 망치지 않으려면 왕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런 질문들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과제입니다. 현대인들은 SNS의 짧은 댓글로 의견을 표현하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자신의 사상과 성찰을 책임질 수 있는 글로 답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답은 많지만 정답은 없습니다. 2025년을 사는 우리는 어떤 책문을 시대에 던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조선시대 과거 시험의 책문은 어떤 방식으로 출제되고 채점되었나요?
A. 책문은 과거 시험 최종 단계인 전시에서 왕이 직접 출제했습니다. 응시자는 4대조와 외조부까지 기재한 답안지를 제출했고, 이름 부분을 잘라내거나 봉한 뒤 다른 사람이 베껴 쓴 사본으로 채점하여 익명성을 보장했습니다. 답안은 유학적 가치에 근거한 논리성과 정책 실현 가능성을 기준으로 평가되었습니다.


Q.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하면 어떤 혜택이 있었나요?
A. 장원급제자는 종 6품에서 출발하며, 병과 합격자보다 약 7~10년의 승진 기간 단축 효과가 있었습니다. 또한 사화(紗帽)를 쓰고 삼일유가를 하며 고향에 내려가 영광을 누릴 수 있었고, 사화에는 무궁화 33송이가 달려 있었습니다. 가문의 명예와 사회적 지위 상승도 보장되었습니다.


Q. 책문에서 왕을 비판하는 답안을 제출하면 불이익을 받지 않았나요?
A. 광해군 때 임수경은 왕의 책문 주제를 벗어나 외척과 후궁의 부정, 인재 등용 불공정, 왕이 쓴소리를 듣지 않는 문제를 직언했습니다. 광해군은 격노하여 삭과(명단 삭제)를 명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넉 달간의 논쟁 끝에 결국 복권되었습니다. 이는 책문이 비판적 의견도 허용하는 공론의 장이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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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A_B78Utte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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