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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의 리더십 (경연, 사림 등용, 균형 정치)

by gohappyjan 2026. 2. 28.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

솔직히 저는 성종이라는 왕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경국대전을 완성한 왕 정도로만 알고 있었죠. 그런데 경연 기록을 들여다보면서 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사람은 단순히 법전을 정비한 게 아니라, 신하들과의 관계 자체를 재설계한 군주였습니다. 12살에 즉위해서 수렴청정을 거쳐 친정을 시작했고, 9,000회가 넘는 경연을 통해 신하들과 소통했다는 기록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치밀한 전략이 숨어 있었습니다.

경연을 통한 소통 방식

성종이 조선왕조실록에 남긴 경연 기록은 9,000회가 넘습니다. 세종이 1,800여 회, 영조가 3,400여 회였던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수치입니다. 여기서 경연이란 왕과 신하가 함께 경전을 공부하고 국정을 논의하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왕의 제왕학 수업이자 정책 토론회였던 셈이죠(출처: 한국고전번역원).

제가 직접 실록 기사를 읽어보니 성종은 제사를 지낸 날에도 경연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신하들이 "오늘은 쉬셔도 됩니다"라고 했을 때 성종은 "나는 하루라도 배우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다"고 답했습니다. 이런 태도가 신하들에게 어떤 신호를 보냈을까요? 왕이 먼저 배움에 대한 자세를 보이면, 신하들도 함부로 간언을 주저하지 않게 됩니다.

실제로 성종은 신하들의 직언을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오급 관리인 김원신이 이품 판서를 소인배라고 탄핵했을 때, 다른 왕이었다면 김원신을 벌했을 겁니다. 하지만 성종은 오히려 "그대가 죽음 앞에서도 말을 바꾸지 않은 것은 신의 때문이다"라고 칭찬하며 승진시켰습니다. 이런 일화가 쌓이면서 신하들은 왕 앞에서도 기탄없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사림 등용과 훈구 견제

성종이 사림을 등용한 이유는 단순히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죠. 훈구파란 세조 때부터 여러 왕을 섬기며 권력을 쥔 대신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부정부패의 온상이기도 했습니다.

성종은 과거 시험을 통해 새로 관직에 진출한 사림들을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같은 삼사(三司) 대간직에 임명했습니다. 여기서 삼사란 왕권과 신권 사이에서 견제와 균형을 담당하는 핵심 기관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지금의 감사원, 검찰, 국회 상임위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죠. 사림들은 학문적 소양은 높았지만 정치적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훈구파의 부정을 고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제 생각엔 이 구조가 성종 정치의 핵심이었습니다. 훈구파를 완전히 배제하면 국정 운영이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사림을 등용하지 않으면 권력의 부패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성종은 두 세력을 동시에 활용하면서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좌승지가 지방 수령의 뇌물을 받았다고 고백했을 때, 성종은 그의 정직함을 높이 평가하며 용서했습니다. 반면 훈구 대신인 현석규를 탄핵한 김원신에게는 "목숨을 걸고 간언 하는 신하를 처벌하면 아무도 제대로 간언 하지 않을 것"이라며 보호해 줬습니다.

자기 기준은 더 엄격하게

성종의 리더십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신하들에게는 관대하되, 자신에게는 더 엄격했다는 점입니다. 손순효라는 신하가 술에 취해 용상 계단에 걸터앉아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라고 했을 때, 성종은 그를 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건강이 걱정되니 하루에 석 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며 은잔을 선물로 줬습니다.

솔직히 이 대목에서 저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게 정말 관대함일까, 아니면 신하들의 충언을 듣기 위한 계산된 관용일까? 실록을 더 읽어보니 성종은 신하들의 비판을 그냥 듣고 넘긴 게 아니었습니다. 과거 시험에서 인재가 없다는 손순효의 지적에 "그대 말대로 내가 게을러서 인재 양성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라고 인정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먼저 인정해야 신하들도 왕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성종의 이런 태도가 만든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신하들은 왕 앞에서도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고,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면서도 극단으로 치닫지 않았습니다. 성종은 "대간의 말이라도 들어줄 만하면 들어주고 들어줄 수 없으면 들어주지 않는 것이니, 서로 부딪히기만 하는 것은 아름다운 풍습이 아니다"라고 정리했습니다.

제가 실제로 이 기록들을 읽으면서 느낀 건, 성종이 만든 균형이 조선 중기까지 이어졌지만 동시에 붕당정치의 씨앗도 함께 뿌렸다는 점입니다. 사림의 성장은 결국 동인과 서인의 분열로 이어졌고, 유교 이념의 강화는 사회의 유연성을 제약했습니다. 경국대전의 완성은 법치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법이 권력관계의 모순까지 해결해주진 못했습니다.

성종은 이상적인 제도 군주였을까요, 아니면 갈등을 다음 세대로 미룬 관리자였을까요. 제 생각엔 둘 다입니다. 그는 당대에 할 수 있는 최선의 균형을 만들었지만, 그 균형이 영구적일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성종이 보다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시도했다면 조선의 구조는 달라졌을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12살에 즉위해서 수렴청정을 거친 왕이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제한적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9,000회의 경연을 통해 신하들과 소통하고, 자신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며,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그의 노력은 여전히 배울 점이 많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aTb92MRf-bA&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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