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정비결로만 알려진 이지함은 조선시대 가장 특별한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천문지리, 의학, 복서, 율려, 산수에 능했으며 관상, 심방, 비결 등 통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명문가 출신 양반이었지만 머리에 솥을 쓰고 남악신을 신은 채 거리를 돌아다니는 기인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임진왜란을 15년 전에 예언하고, 백성들을 위해 장사를 하며 재산을 나눠준 그의 삶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조선 3대 기인, 이지함의 특별한 삶
토정 이지함은 한산 이 씨 명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고려 때 충신이자 뛰어난 인재였던 목은 이색의 6대손이며, 조카 이산해는 선조 때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가문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지함이 선택한 삶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의 외모부터 범상치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건장한 체격에 얼굴은 둥글고 살이 붙어 있었으나 검은 피부에 눈은 빛나고 목소리는 웅장했다고 합니다. 그는 사서삼경의 유교병자를 다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까지 아우를 정도로 다방면에 뛰어난 학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이라면 당연히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지함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기이한 행동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머리에는 솥을 쓰고 다녔는데, 이는 소수를 쥐고 다니기 싫어서 새로 관을 만들어 거기에 밥을 짓고 먹은 후 다시 씻어서 머리에 관으로 썼기 때문입니다.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허름하고 누추한 옷을 입었으며, 비가 오지 않는데도 남악신을 신고 뒤뚱뒤뚱 걸어 다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손가락질하고 놀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생활 방식이었습니다. 팔도를 두루 유람하면서도 탈 것을 빌리는 일이 없이 두 발로 걸어 다녔고, 바다 건너 섬으로도 자주 다녔습니다. 1인 편주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네 모퉁이에는 표주박을 묶어 달고 제주도에 세 번이나 드나들었지만 풍랑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제주 바다를 건너는 일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지만, 그는 천 문 칠 위와 점술에 능했기에 바람의 기운과 조수의 시기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잠을 잘 때는 길가에 서서 지팡이를 짚고 서서 잤으며, 5일에서 6일씩 깨지 않고 잠을 잤다고 합니다. 또한 굶주림을 참는 데 있어서는 12일이나 익힌 음식을 먹지 않았고, 목마름을 참음에 있어서는 한여름에도 물을 마시지 않을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미래를 꿰뚫는 예언과 천문학의 대가
이지함의 가장 놀라운 능력은 바로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의 능력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여러 제자가 있었는데, 그중 특별한 제자로 조헌이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조헌은 후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조헌 장군이 되는 인물이었죠. 이지함 선생은 조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5년 후에 피가 천리를 흐르게 함이 있을 것이다." 그 15년 후에 피가 천리를 흐르게 한 사건이 바로 임진왜란이었습니다.
이지함의 예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헌에게 "나는 아산에서 죽을 것이고 자네는 금산에서 죽을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정확히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지함은 아산 현감으로 아산에서 생을 마감했고, 조헌 장군은 임진왜란 때 금산에서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확한 예언은 그가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천문학과 음양오행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시대에 천문학이 그리 발달하지도 않았고, 중국에 유학을 가지도 않았는데 이지함이 어떻게 하늘을 꿰뚫고 미래를 예측하는 지혜를 가지게 되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이는 그의 끊임없는 학습과 관찰, 그리고 세상을 떠돌며 쌓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토정유고에 따르면 그는 천문지리, 의학, 복서, 율려, 산수, 소리에 능했고, 관상, 심방, 비결 등 통하지 않는 분야가 없었습니다.
요즘 시대에는 한 분야에 정통하기 위해 노력해도 성과를 내기가 힘든데, 이지함은 여러 방면에서 능력이 출중했다는 점에서 정말 훌륭하고 본받을 만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예언 능력은 단순한 미신이나 점술이 아니라, 자연 현상과 인간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력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제주도를 오가며 풍랑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표주박이 배의 균형을 잡아준 물리적 원리뿐 아니라, 바람과 조수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는 천문학적 지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을 위한 헌신과 장사하는 양반
이지함이 현실 정치를 멀리하고 기인의 삶을 살게 된 데는 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연산군 때 일어난 갑자사화에 그의 아버지가 연루되어 유배를 가게 되었고, 다행히 중종반정으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종 때 일어난 을사사화는 이지함에게 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의 절친한 벗이었던 승정원 사관 안명세가 시정기라는 기록에 외척 간의 정치적 사건을 상세하게 기록했다가 윤원형 세력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고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안명세가 죽기 한 해 전에는 양재역 벽서 사건이 있었습니다. 양재역에 "여주가 정권을 잡고 간신들이 권세를 농단하니"라는 방이 붙었고, 그 여주가 바로 문정왕후였습니다. 이지함은 불현듯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아내의 가문에 길할 기운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급히 처자식을 데리고 처가를 나와 몸을 피했고, 바로 다음 날 그의 장인이 양재역 벽서 사건에 휩싸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벗과 장인이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죽는 것을 목격한 이지함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는 조선의 이단아가 되었습니다.
이지함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결혼 후 부인이 비단으로 멋진 도포를 지어줬는데, 그는 그 도포를 입고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는 도포 없이 돌아왔습니다. 다리 밑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거지 형제 3명을 보고, 자신의 도포를 벗어 세 등분해서 그 아이들을 덮어준 것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가 이지함이었습니다.
그 시기 조선은 오랜 흉년과 관리들의 수탈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생업을 잃은 백성들은 정처 없이 떠도는 유랑민이 되었고, 열집 중 아홉 집은 비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조선의 3대 도적 중 한 명인 임꺽정이 활약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지함은 백성들을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는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었는데 그 열매가 수만 개나 되었습니다. 박을 갈라서 바가지를 만들고 그것으로 곡식을 사들였는데 거의 천 섬에 이르렀고, 그것을 모두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손수 상인이 되어 백성을 가르치고 맨손으로 생업에 힘써 몇 년 안에 수만 석에 이르는 곡식을 쌓았습니다. 양반이 장사를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지함은 백성들을 위해 기꺼이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흙집에서 살면서도 장사로 번 큰돈을 모두 백성들에게 베풀었습니다.
토정 이지함은 토정비결의 저자로만 알려진 인물이 아니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기인이자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한 선비였습니다. 정치적 사건으로 벗과 장인을 잃은 후 현실 정치를 멀리하고 백성들 속으로 들어간 그의 선택은, 오히려 더 큰 가치를 실현하는 길이었습니다. 천문학에 능통하여 미래를 예측하고, 양반이면서도 장사를 하여 백성을 구제한 그의 삶은 시대를 초월한 헌신의 표본입니다.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이지함의 삶은 오늘날에도 배움과 나눔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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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PUc2I06Rd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