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시대의 설화는 특정 인물이나 사건뿐 아니라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특히 개성, 전주, 평양은 고려의 수도이자 주요 도시로, 이곳을 배경으로 한 설화들은 단순한 이야기 이상으로 그 지역의 종교, 민속, 정치적 상징성을 보여줍니다.
이번 글에서는 각 지역의 대표 설화를 중심으로 고려시대 사람들의 삶과 사유, 그리고 문화의 지역적 차이를 살펴봅니다.
개성 지역 설화: 고려 왕조의 중심에서 피어난 신화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던 송악(개경)으로, 국가의 정치, 문화, 종교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곳을 배경으로 하는 설화들은 대부분 왕실, 불교, 예언, 천명과 관련된 내용이 많아, 설화가 통치 정당성과 왕조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설화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왕건 관련 설화입니다. 특히 “왕건의 탄생 설화”는 송악 지방에서 왕건이 태어났고, 하늘이 점지한 인물로서 조선을 통일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설화는 단순한 출생 이야기가 아니라, 고려 왕조의 정통성과 천명(天命)을 강조하기 위한 신화적 장치로 작용했습니다.
또한 개성 지역에는 불교 중심 설화도 다양합니다. 대표적으로는 왕륜사(王輪寺)에 얽힌 이야기들이 있으며, 이 사찰은 왕건이 직접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설화에서는 종종 부처의 가호나 신비로운 꿈을 통해 왕이 국사를 결정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는 고려 왕권이 불교를 통치의 도구로 활용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합니다.
개성 설화의 공통점은 대체로 국가적 규모의 상징과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왕의 출생, 꿈, 예언, 불교적 신비 체험 등이 주요 테마이며, 설화의 구조도 웅장하고 서사적입니다. 이는 개성이 당시 왕조 이데올로기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문학적 증거입니다.
전주 지역 설화: 후백제의 기억과 민속적 색채
전주는 후삼국 시대 후백제의 도읍지였으며, 고려시대에도 남부 지역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전주 설화는 개성의 왕권 중심 설화와 달리, 민속성과 향토색이 강하게 드러나며, 종종 지역 인물의 영웅담이나 풍류적 이야기들이 설화의 중심을 이룹니다.
가장 유명한 설화는 “견훤 설화”입니다. 비록 견훤은 고려의 적국이었던 후백제의 왕이지만, 전주와 주변 지역에서는 민중의 영웅으로 기억되며 다양한 설화를 통해 전해집니다. 견훤의 태몽, 비범한 출생, 성장 과정에서 보인 기이한 기질 등은 고려 정권 이후에도 전주 지역에서 후백제 정통성을 인정받았던 문화적 흔적입니다.
또한 전주 향교 주변에 전해지는 유교적 설화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는 조선시대에 형성된 이야기가 일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지만, 고려 후기의 유교 확산 과정에서 비롯된 전설적 이야기로도 해석됩니다. 유생이 신령한 기운을 받아 과거에 급제하거나, 선비의 의로운 행동이 지역 사회를 구했다는 식의 내용이 대표적입니다.
전주 설화의 특징은 불교적 색채보다 지역 공동체 중심의 민속적 요소, 현세적 가치, 의로움을 강조하는 점입니다. 이로 인해 전주의 설화는 개성과 평양보다 현실성 있고 인간 중심적이며, 감정에 호소하는 구조가 강합니다.
또한 전주는 예술과 풍류가 발달한 지역으로서, 판소리와 연결되는 구술 설화 전통이 활발했습니다. 이 설화들은 후대 구비문학에도 영향을 미쳐, 설화에서 판소리로의 전승이라는 흐름을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평양 지역 설화: 고대 신화의 계승과 북방 세계관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였고, 고려시대에는 서경(서쪽 수도)으로 불리며 북방 문화와의 접점이었습니다. 따라서 평양 설화는 고대 신화적 요소와 북방적 상상력, 그리고 초월적인 인물 서사가 강조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대표적인 설화는 단연 ‘단군신화’입니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이 설화는 하늘의 신 환인이 인간 세상을 다스릴 사람으로 환웅을 내려보내고, 그가 곰과 호랑이의 시험을 통해 곰 여인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내용입니다. 이 신화의 배경이 평양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이는 평양이 한민족 시원의 땅이라는 인식을 부여하기 위한 설화적 장치였습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단군신화를 고려 왕조의 정통성과 연결 짓는 시도가 있었고, 평양은 신성한 도시로 재해석되었습니다. 단군묘, 단군제사, 단군 관련 사적들이 고려시대에도 복원되거나 창건되었으며, 이에 따라 단군 중심 설화의 정치적 활용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평양 지역에는 요괴나 귀신, 신선 이야기도 많이 전해집니다. 이는 고구려, 발해, 거란, 여진 등의 북방 민속과 혼합된 세계관으로, 설화에 정령적 사고와 다신적 상상력이 드러납니다. 평양에서 전해지는 설화들은 개인의 깨달음보다는 집단과 자연, 신과 인간의 관계를 강조하며, 장대한 신화 구조를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평양은 한강 이북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국경과 전쟁, 외침에 관한 설화도 풍부합니다. 고려 후기 몽골과의 전쟁 시기에 생겨난 강동성 전설, 평양성을 지킨 의병 이야기 등은 지역의 저항 정신과 영웅주의를 설화로 형상화한 사례입니다.
고려시대 설화는 지역별로 매우 뚜렷한 성격을 보여줍니다. 개성은 왕조 중심의 신화적·불교적 서사로 국가 통합과 왕권 강화를 뒷받침했고, 전주는 민속성과 지역 영웅 중심의 설화를 통해 민중 중심 문화를 형성했으며, 평양은 고대 신화와 북방 문화의 접점에서 형이상학적이고 집단적인 서사를 창출했습니다.
이러한 지역 설화들은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각 지역의 설화는 그곳 사람들의 기억, 역사적 경험, 정신적 지향을 담고 있으며, 현대 지역문화 콘텐츠 개발에도 귀중한 자산이 됩니다. 앞으로도 이들 설화를 재해석하고, 교육·예술·관광 자원으로 발전시킨다면, 고전이 오늘날 지역 정체성 회복의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