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9년 '섭섭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한 여성은 조선 여성 교육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차미리사는 배화여학교 사감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근화여학교를 설립해 여성 자립교육에 헌신했습니다. 그녀의 삶은 교육을 통한 여성 해방의 가능성과 동시에 근대적 변화의 한계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입니다. 과연 그녀가 펼친 교육운동은 진정한 해방의 시작이었을까요, 아니면 제한된 조건 속의 최선이었을까요.
근화여학교 설립과 여성교육의 확장
차미리사는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여성교육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조선여자교육회는 조선교육회보다 먼저 설립된 단체였으며, '여자실'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그녀가 이 단체를 설립한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가정에 있는 여자들은 편지 한 장도 자신의 손으로 쓰지 못하고 신문 한 장을 마음대로 보지 못한다. 눈멀고 귀 멀고 벙어리 된 자매를 비참한 운명에서 구해보고자 한다"는 그녀의 선언은 당시 여성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부인야학강습소는 10명으로 시작했지만 6개월 만에 160여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는 교육에 대한 여성들의 갈증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차미리사는 1921년 여자강연대를 꾸려 전국을 순회했습니다. 7월부터 10월까지 84일간 67개 마을을 돌며 강연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모금한 기금으로 1923년 근화여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근화'는 무궁화를 뜻하며, 이화·배화처럼 '화'자를 사용한 이름이었습니다.
근화여학교는 모든 여성에게 열린 공간이었습니다. 학교 행사 사진에는 머리를 땋은 처녀들뿐 아니라 머리를 올린 기혼 여성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차미리사는 "나는 가정도 없고 아무런 일가친척도 없다. 하나 두었던 딸은 어디에 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니 이 근화는 내 가정이고 이곳의 학생들은 모두 내 딸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에게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여성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행위였습니다.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는 근화여학교의 창학이념은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한 선언이었습니다.
자립교육을 통한 경제적 독립의 추구
차미리사는 교육의 목표를 명확히 했습니다. 1926년 신문 기고문에서 그녀는 이렇게 밝혔습니다. "조선 여자에게는 무엇보다 직업적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인 해방이니 가정 개량이니 하지만 다 제 손으로 제밥을 찾기 전에는 해결이 안 될 것입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여성 해방을 추상적 권리가 아닌 경제적 자립과 연결시킨 것은 현실적이면서도 전복적인 발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여성들에게 제봉과 자수 등 실업교육을 우선적으로 시작했고, 1935년 학교 이름을 '근화여자실업학교'로 바꾸었습니다. "조선의 딸들아 제발 죽지 말고 살아라. 남자의 덧붙이가 되지 말고 스스로 삶을 일구어 나가야 한다"는 그녀의 외침은 여성을 경제적 주체로 세우려는 시도였습니다. 1936년에는 남편의 성을 따르던 '김미리사'에서 자신의 성을 되찾아 '차미리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명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비판적 질문이 제기됩니다. 차미리사의 자립교육이 과연 얼마나 많은 여성에게 실질적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제봉과 자수는 분명 당시 여성이 접근할 수 있는 현실적인 직업기술이었지만, 이것이 사회·경제 구조 전반을 바꾸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소수의 여성에게 열린 교육 기회가 다수 여성의 현실로 확장되기까지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했습니다. 또한 근대적 여성상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일하는 여성'이라는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지도 성찰해야 합니다. 교육이 해방의 도구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억압의 형태인지는 여전히 논쟁적입니다.
독립운동 참여와 민족교육의 실천
차미리사는 1912년 배화학당 사감으로 귀국하며 교육과 독립운동을 결합했습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 나가서 죽더라도 독립을 해야 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나라 없는 설움은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내 한 목숨이 죽고 나라를 찾으면 대대손손이 다 잘 살 것이 아닌가?" 이러한 영향으로 1920년 3월 1일, 3·1 운동 1주년에 배화여학교 학생 여섯 명이 다시 만세운동을 펼쳤고, 이들은 2018년 대통령표창을 받았습니다. 또한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 근화여학교 학생들이 대거 참여한 것도 차미리사의 민족교육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압박은 거세졌습니다. 배화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 배후로 지목된 차미리사는 사감직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1930년대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이 본격화되면서 1937년 '근화'라는 이름조차 쓸 수 없게 되었고, 그녀는 학교 이름을 '덕성여자실업학교'로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학교를 지키기 위해 교장직마저 사퇴했고, 학교는 일본이 지정한 친일파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광복 후 그녀는 통일운동에 적극 참여했지만 1955년 76세로 별세했습니다. 그녀의 무덤에는 "내게는 한 가지 한이 있다. 온전한 독립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유한이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지만, 돌아가신 지 47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2013년에야 후손이 나타나 훈장을 전달받았습니다. 근화여학교는 현재 덕성여자대학교로 이어지고 있으며, 인근에는 차미리사의 묘소와 '차미리사 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화여대가 외국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조선 최초의 여학교라면, 덕성여대의 전신인 근화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금으로 설립된 학교였습니다. 이화의 김활란이 "조선을 밝힐 등불이 되어라"라고 했다면, 차미리사는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라고 말했습니다.
차미리사의 삶은 교육이 곧 해방이라는 신념의 실천이었지만, 동시에 그 한계도 드러냅니다. 그녀의 운동이 교육 중심에 머물며 사회·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들지 못했다는 점, 일부 여성에게만 열린 기회였다는 점은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던진 질문—여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차미리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이 선택한 삶을 아름답게 가꾸시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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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FRok5WATVnw&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