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가 하면 흔히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연해주에서 한인들의 집집마다 초상화가 걸려 있을 정도로 존경받았던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 땅에서 거부가 되었지만, 그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은 최재형 선생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한 개인이 어떻게 그토록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고, 학교를 세우고, 무장투쟁까지 후원할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기록을 따라가다 보니, 그의 삶은 단순한 후원자를 넘어 전략가이자 공동체 수호자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연해주에서 꽃핀 한인 공동체의 힘
최재형이 연해주로 건너간 건 1869년, 그의 나이 겨우 9살 때였습니다. 함경도에 대기근이 닥쳤고, 노비 출신 아버지와 기생 출신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당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아래에서 국경을 넘는 건 사형감이었으니, 얼마나 절박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11살에 가출해 포시에트 항구까지 맨발로 걸어간 소년은 선장 부부를 만나 6년간 선원 생활을 하며 러시아어와 세계 정세를 익혔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시기가 그의 인생을 결정지은 전환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럽과 동남아를 오가며 근대 문물을 직접 목격한 경험은, 훗날 한인 사회를 조직하고 경제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 자산이 되었으니까요.
블라디보스토크 무역회사에서 일하며 실력을 인정받은 최재형은 10년 만에 가족을 찾아 양치헤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러시아 군대에 소와 연어를 납품하며 큰 돈을 벌었고, 도로 공사 감독으로도 활약했습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로부터 두 차례나 훈장을 받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죠. 하지만 그가 번 돈은 자신을 위해 쓰이지 않았습니다. 연해주 한인 마을에 무려 32개의 소학교를 세우고, 은행 이자로 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연해주 한인 마을을 "비옥한 농지와 깨끗한 촌락, 저택 같은 집들"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조선 본토를 "지저분하고 게으른 백성들"이라고 혹평했던 그가 연해주 한인들을 보고 "장래 이 민족에게 큰 가능성이 기대된다"고 평가를 바꿨다는 건, 최재형이 만든 공동체가 얼마나 안정적이었는지 보여줍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과연 그의 지원이 단순한 시혜였을까요, 아니면 장기적 전략이었을까요? 교육과 경제적 자립은 독립운동의 기반입니다. 최재형은 그걸 누구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계도 보입니다. 개인의 재력에 의존하는 구조는 지속 가능성이 약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실제로 1911년 장티푸스를 핑계로 한인들이 신한촌으로 강제 이주당했고, 러시아 혁명 이후 정세가 급변하면서 그가 쌓아올린 기반은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항일 투쟁의 든든한 후원자에서 희생자로
최재형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건 1907년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만나면서부터입니다. 이범윤이 이끄는 의병들에게 신식 무기와 군복, 훈련장을 제공했고, 함께 동의회를 조직했습니다. 회령 전투에서 일본군 40명을 사상시키고 우리 측은 부상자 4명에 그친 전과는, 러시아제 신식 무기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의거 역시, 최재형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안중근은 대동공보의 기자로 활동하며 최재형과 긴밀히 협력했고, 의거 후 처형될 때까지 그의 가족은 최재형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최재형은 왜 고종의 부름을 거절했을까요? 1896년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사정에 밝은 인재로 지목되어 귀국 명령을 받았지만 그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노비의 아들이 왕의 부름을 받았다는 건 가문의 영광인데도 말이죠. 제 생각엔, 그는 조선 조정의 무능함을 이미 꿰뚫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연해주에서 한인들과 함께 실질적 기반을 다지는 게, 허울뿐인 벼슬보다 조국에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던 게 아닐까요. 실제로 그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됐을 때 재무총장으로 임명됐지만, 그는 이번에도 상해로 가지 않고 연해주에 남았습니다. "당신이 있을 곳은 연해주 한인들과 함께"라는 신념을 끝까지 지켰던 거죠.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참혹했습니다. 1918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 대거 파병되자, 최재형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나섰습니다. "나는 이미 늙었고 오래 살았으니 죽어도 되지만, 너희들은 살아남아야 한다." 60세의 나이에 일본군에 체포된 그는 정식 재판도 없이 총살당했고,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스탈린 시대에 총살당하거나 강제 노역을 당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습니다. 대한민국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건 1962년이었지만, 진짜 후손이 확인된 건 1995년이었습니다. 그 사이 가짜 후손이 연금을 타고 현충원에 가묘까지 만들었다가 나중에 철거됐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를 넘어 씁쓸함을 남깁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고생하고, 친일파의 후손이 떵떵거리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요. 최재형은 개인의 희생만으로 독립운동을 지탱하려 했지만, 결국 그 구조는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제도적 뒷받침 없이 개인의 헌신에만 기대는 방식은, 장기적으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선택은 분명 용기였고, 그가 없었다면 연해주 한인 사회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최재형 선생은 누구의 따뜻한 난로였을까요. 연해주 한인들에게 그는 '최 패치카', 즉 난로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그 난로가 꺼진 뒤, 우리는 무엇을 준비했을까요. 그의 삶은 헌신의 의미와 동시에, 지속 가능한 독립운동 체계의 필요성을 함께 일깨웁니다. 지금이라도 과거의 잘잘못을 명확히 따져,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이 억울함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Kw9gB9joHGs&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