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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시무십여조 (개혁 좌절, 골품제 한계, 지식인의 책임)

by gohappyjan 2026. 2. 13.

해운대
해운대

 

신라 말기는 중앙 귀족의 권력 다툼과 지방 호족의 성장, 그리고 골품제라는 신분 제도의 모순이 극에 달한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당나라 유학파 지식인 최치원은 「시무십여조」라는 개혁안을 통해 국가 재건을 꿈꿨지만, 현실 정치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삶은 뛰어난 통찰력과 학문적 성취를 가졌음에도 제도와 권력 구조를 바꾸지 못한 지식인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오늘날에도 그의 이야기는 이상과 현실, 지식과 실행력 사이의 간극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당나라에서의 성공과 신라 귀환 후 개혁 좌절


최치원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육두품 출신이었던 그는 신라 사회에서 골품제라는 신분 제도의 제약을 받았기에,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더 큰 무대가 필요했습니다. 아버지는 "10년 안에 빈공과에 합격하지 못하면 부자의 연을 끊겠다"는 모진 말로 아들을 독려했고, 최치원은 남들이 백의 노력을 할 때 천의 노력을 하겠다는 각오로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 결과 최치원은 6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장원 급제하며 당나라 전역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당시 빈공과는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과거 시험으로, 약 8,000명의 유학생이 몰려 있던 당나라에서 최고의 성적으로 합격한 것은 대단한 성취였습니다. 특히 그 직전에는 발해 출신 유학생이 장원을 차지하면서 신라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기에, 최치원의 합격은 "예전의 수치를 씻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최치원의 명성은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가 작성한 「토황소격문」은 반란군 수괴 황소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강렬한 문장으로 가득했습니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 할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까지 너를 죽이려 은밀히 의논하였다", "너의 몸뚱이는 도끼날의 기름이 되고 뼈는 술의 밑에 가루가 될 것이며 처자는 잡혀 죽을 것이다"와 같은 표현은 황소를 침상에서 떨어뜨릴 만큼 두려움을 느끼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25세의 최치원은 황제로부터 정오품 이상에게만 내리는 자금어대를 하사 받으며 당나라에서 확고한 지위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최치원은 당나라에서의 보장된 출세를 뒤로하고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조국을 위해 쓰겠다는 뜻을 품고 귀국했지만, 신라 사회는 그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육두품 출신이 당나라에서 큰 명성을 얻고 돌아오자 진골 귀족들은 시기와 질투로 그를 대했고, 최치원은 한림박사라는 낮은 벼슬에 임명되었습니다.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이었지만, 그의 능력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자리였습니다.
최치원은 중앙에서 일하다가 스스로 외직을 요청해 부산 태수 등 지방직을 전전하며 신라 사회의 실상을 목격했습니다. 내직과 외직을 모두 경험한 그는 신라가 직면한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라는 개혁안을 올렸습니다. 이 개혁안에는 골품제의 모순, 귀족의 부패, 농민의 궁핍 등 신라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이 담겨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진성여왕은 개혁 의지가 있었음에도 진골 귀족들의 반대를 극복할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권력을 나눠 가진 귀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개혁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최치원의 제안은 결국 무산되었습니다. 육두품 출신의 목소리는 골품제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힘을 잃었고, 신라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원종과 애노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고, 왕위 다툼이 격화되면서 신라는 멸망으로 치달았습니다.

구분 당나라 시기 신라 귀환 후
신분 외국인 유학생 육두품 출신
성취 빈공과 장원, 자금어대 하사 한림박사, 지방 태수
평가 문장가·외교관으로 명성 진골 귀족의 시기와 질투
결과 능력 인정, 승진 보장 개혁안 무산, 은둔 선택

 

 

골품제 한계와 진성여왕의 리더십 부재


최치원의 개혁이 실패한 근본 원인은 신라 사회의 구조적 한계인 골품제에 있었습니다. 골품제는 혈통에 따라 정치적·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신분 제도로,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육두품 이하는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인정받았지만, 신라에서는 육두품이라는 출신 때문에 진골 귀족들의 벽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진성여왕은 신라의 51대 왕으로, 경문왕의 딸이자 헌강왕과 정강왕의 누이였습니다. 정강왕이 즉위 1년 만에 사망하자, 그 집안에서 왕위를 지키기 위해 여성임에도 왕위에 올랐습니다. 정강왕은 진성여왕에게 "담이 크고 귀미리 장대하니 왕위를 이으라"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그녀는 신문왕과 같은 강력한 리더십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진성여왕은 최치원의 능력을 알고 있었고 개혁의 필요성도 인식했지만, 진골 귀족들을 설득하거나 제압할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습니다. 당시 신라는 왕위 다툼이 극심한 시기였고, 진골 귀족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왕권마저 견제했습니다. 최치원의 개혁안이 귀족들의 기득권을 위협했기에, 그들은 단합하여 반대했고 진성여왕은 이를 돌파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진성여왕은 스스로 왕위를 내려놓았습니다. "최근 들어 백성들은 곤궁하고 도적이 봉기하는 것은 나의 부덕한 탓이다. 나는 어진 사람에게 양위하고 왕의 자리를 피하려 결심했다"며 오빠 헌강왕의 서자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입니다. 이는 왕위 다툼의 시대에 드문 결단이었지만, 신라의 몰락을 막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진성여왕 이후에도 다섯 명의 왕이 더 즉위했지만, 신라는 결국 멸망했습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멸망은 진성여왕 때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리더로서 인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개혁을 실행할 결단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최치원이라는 뛰어난 인재가 있었음에도 그의 능력을 신라 사회에서 펼치게 하지 못한 것은, 지도자의 리더십이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최치원은 자신이 신라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산천을 떠돌며 은둔 생활을 했고, 어떤 기록에는 해인사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하며, 다른 기록에는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고 전합니다. 당나라에서 빛났던 인재가 조국에서는 비운의 지식인으로 잊힌 것입니다.
그러나 최치원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쌍계사의 진감국사 대공탑비는 최치원이 글을 썼다고 전해지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부산 해운대의 이름 역시 최치원의 자(字)인 '해운'에서 유래했습니다. 경상북도 영천의 고운사도 그의 또 다른 자인 '고운'과 관련이 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식인의 책임과 이상의 실행 사이 간극


최치원의 삶은 지식인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신라 사회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했고, 「시무십여조」를 통해 개혁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진단과 처방만으로는 현실이 바뀌지 않습니다. 개혁안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정치적 역량, 즉 지지 세력을 조직하고 반대 세력을 설득하거나 제압하는 힘이 필요했습니다.
사용자의 비평처럼, 최치원이 지방 호족과 중앙 귀족의 이해관계를 설득하거나 조직화하는 정치력을 충분히 발휘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는 유학, 불교, 도교를 아우르는 사상적 포용력을 지녔지만, 이러한 철학적 깊이가 구체적인 제도 설계로 이어지기에는 추상적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개혁은 이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현실 권력을 움직이는 실행 전략이 필수적입니다.
최치원이 결국 은둔을 택한 것은, 현실 정치의 한계를 넘지 못한 선택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는 부패한 체제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지키는 방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골품제라는 구조적 모순과 진골 귀족의 기득권이 너무 공고했기에,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변화를 이끌어내기 불가능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치원은 실패한 개혁가일까요, 아니면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일까요? 만약 그의 「시무십여조」가 받아들여졌다면 신라의 몰락은 늦춰졌을지, 아니면 이미 구조적 한계가 깊어 어떤 개혁도 소용없었을지는 역사적 가정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치원이 제시한 문제의식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점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수저 계급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조건이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인식은, 신라의 골품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최치원은 흙수저였지만 당나라에서는 금수저 못지않은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신라로 돌아오자 다시 흙수저의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이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제도적 벽이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원의 삶은 포기하지 않는 것의 가치를 말합니다. 그는 비록 개혁에 실패했지만, 그의 글과 사상은 후대에 길이 전해졌습니다. 「계원필경」은 중국 학자들이 역사서를 검증할 때 참고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고, 그의 이름은 해운대와 고운사 같은 지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흙수저가 불의 시련을 거쳐 멋진 도자기로 다시 태어나듯, 최치원은 좌절 속에서도 역사에 새겨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지식인의 책임은 이상을 말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실행력, 설득력, 조직력이 함께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제도와 리더십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능력을 펼칠 수 없습니다. 최치원의 비극은 개인의 실패라기보다,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 시대의 실패였습니다.

구분 최치원의 강점 한계/의문점
학문적 성취 빈공과 장원, 계원필경 편찬 사상의 추상성, 구체적 제도 설계 부족
문제 진단 신라 사회 모순 정확히 파악 정치 세력 조직화 능력 의문
개혁 제안 시무십여조 제출 진골 귀족 설득 실패, 실행력 부족
최종 선택 은둔을 통한 조용한 저항 현실 극복 불가능한 한계 인정


최치원은 통찰은 충분했지만 실행의 용기가 부족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실행할 수 없는 환경이었던 것일까요.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던져집니다. 이상을 품는 것과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것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최치원의 삶은 그 답을 찾는 여정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보여줍니다.
최치원의 이야기는 한 인재의 비극이자,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 시대의 실패입니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성취와 개혁 의지를 가졌지만, 골품제라는 제도적 한계와 진성여왕의 리더십 부재, 진골 귀족의 기득권 수호 앞에서 좌절했습니다. 사용자의 비평처럼, 그의 삶은 지식인의 책임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이상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실행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재를 알아보고 활용하는 리더십 없이는 아무리 뛰어난 인재도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최치원은 실패했지만, 그의 이름은 해운대와 고운사에, 계원필경에, 그리고 역사 속에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최치원의 「시무십여조」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나요?
A. 「시무십여조」의 원문은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시 신라 사회의 문제였던 골품제 모순, 진골 귀족의 부패, 농민의 궁핍, 지방 호족의 성장 등을 다루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최치원이 내직과 외직을 모두 경험하며 신라 사회 전반을 파악했기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Q. 최치원이 당나라에서의 출세를 버리고 신라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최치원은 조국 신라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쓰고자 귀국했습니다. 당나라에서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도 외국인으로서의 한계가 있었고, 그는 신라 사회를 개혁하고 백성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뜻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신라에 돌아와서는 골품제와 진골 귀족의 벽에 가로막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좌절했습니다.


Q. 최치원의 글솜씨는 얼마나 뛰어났나요?
A. 최치원의 문장력은 당대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습니다. 그가 작성한 「토황소격문」은 반란군 수괴 황소를 심리적으로 압박해 침상에서 떨어뜨릴 만큼 강렬했고, 「계원필경」은 중국 학자들이 역사서를 검증할 때 참고하는 권위 있는 자료로 인정받습니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내용이 다를 때 계원필경을 참고할 정도로, 그의 글은 정확성과 문학성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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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k9RLH2feL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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