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여행을 다녀온 뒤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태종 무열왕릉 앞에 서 있던 거북 모양의 비석받침, 귀부(龜趺)였습니다. 고개를 빳빳이 든 거북의 턱 아래 붉은 빛깔을 보며 '저건 녹물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원래 화강암에 있던 붉은색 부분을 일부러 그 위치에 배치한 거더군요. 거북이 고개를 들면 턱 아래가 붉게 변한다는 사실을 반영한 조각이라는 설명을 듣고, 신라 장인의 세심함에 감탄했습니다. 저는 그때 느꼈습니다. 이 무덤의 주인, 김춘추라는 인물도 저 거북처럼 치밀하고 전략적인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요.
폐위된 왕손에서 외교의 천재로
김춘추는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였습니다. 왕위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리 있는 존재였죠. 진지왕은 유부녀를 후궁으로 삼으려다 귀족들의 반대로 왕위에서 쫓겨났고, 그 손자인 김춘추는 태어날 때부터 '왕이 될 수 없는 혈통'이라는 낙인을 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가 쪽으로는 진평왕의 외손자였기에, 신분상으로는 완벽한 왕족이었습니다(출처: 문화재청).
저는 경주 사학동 고분군을 걸으며 그의 처지를 상상해 봤습니다. 주변 귀족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언행을 조심하고, 큰 뜻을 품되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젊은 시절. 그런 그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혼인하며 비로소 정치적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김유신이라는 군사적 동맹자를 얻은 셈이었죠. 당시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협공으로 존폐의 기로에 서 있었고, 김춘추는 이 위기를 돌파할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646년, 대야성(大耶城) 함락 사건이 터졌습니다. 여기서 대야성이란 지금의 합천 지역으로, 김춘추의 세력 근거지였습니다. 성주는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이었는데, 그가 부하의 아내를 탐내다 배신을 당해 성이 함락됐습니다. 김춘추의 딸 고타소도 함께 백제군에 피살됐고, 시신은 백제로 옮겨져 감옥 밑에 묻혔습니다. 제가 이 기록을 읽으며 느낀 건, 이건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정치적 파멸이었다는 점입니다. 사위의 실책이 김춘추에게 쏟아지는 비난으로 이어졌고, 그는 기둥에 기대 선 채 눈도 깜빡이지 않을 정도로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김춘추가 정신을 차린 뒤 한 일은 복수였습니다. "내 살아서 백제의 멸망을 보고 말리라." 하지만 신라의 국력만으로는 역부족이었죠. 그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직접 고구려로 건너가 연개소문을 만났습니다. 진골 출신 왕족이 적국 속으로 들어간 겁니다.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김춘추는 뒤에 김유신이 3천 군사를 이끌고 국경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됐고, 김춘추는 고구려 옥에 갇혔다가 신라군의 압박으로 풀려났습니다.
나당동맹 체결과 전략적 선택
고구려에서 실패한 김춘추는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일본에서 신라가 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죠. 결국 그는 당나라로 건너가 당태종을 만났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김춘추의 냉철함을 봅니다. 그는 당태종 앞에서 신라의 급박한 상황을 토로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워 신라에 국학을 세우고 싶다"며 품위 있게 접근했죠.
여기서 나당동맹(羅唐同盟)이란 신라와 당이 고구려·백제를 공동으로 공격하기로 맺은 군사동맹을 의미합니다. 당태종은 안시성 전투에서 패배한 뒤 고구려 재침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김춘추가 제안한 병참 지원은 매력적인 조건이었습니다. 당나라 기록에는 "김춘추의 풍채가 능하고 아름다워 신성한 사람으로 여겼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김춘추는 외교적 수완과 개인적 매력을 모두 발휘해 나당동맥을 성사시켰습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제가 무열왕릉 앞에서 생각한 건, 이 선택이 과연 옳았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나당동맹은 신라를 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당나라의 간섭을 자초했습니다. 외세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한 뒤, 그 힘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설계는 충분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김춘추가 당장의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치러야 했던 나당전쟁과 지역 갈등은 통일의 이면에 드리운 그림자였습니다.
김춘추는 진덕여왕 4년, 화백회의에서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추대됐습니다. "덕망이 높기로는 춘추만 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 만한 뛰어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태종 무열왕이 된 겁니다. 그는 즉위 후 660년 백제를 멸망시켰고, 대야성에서 잃은 딸의 복수를 이뤘습니다.
김인문, 신라 외교를 지탱한 희생
무열왕릉을 나와 도로 건너편으로 가면 김인문(金仁問)의 묘가 있습니다. 김춘추의 둘째 아들이자, 무열왕릉비의 글씨를 쓴 인물입니다. 저는 이 조용한 무덤 앞에서 한참을 섰습니다. 김인문은 명필가로 유명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은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외교 가교였습니다.
김인문은 나당동맹 체결 이후 거의 22년간 당나라에 머물렀습니다. 좋게 말하면 사신, 나쁘게 말하면 볼모였죠. 신라가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 당나라는 김인문을 신라의 새 왕으로 앉히겠다며 위협했습니다. 형 문무왕과 왕위를 놓고 경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김인문은 끝까지 신라에 충성했습니다.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영달보다 국가의 안위를 택한 겁니다.
저는 김인문의 무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건 김춘추 같은 전략가만이 아니라, 김인문처럼 묵묵히 자기 역할을 다한 사람들 덕분이 아니었을까요? 화려한 승리 뒤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희생이 있습니다. 김인문은 왕이 될 수 있는 혈통이었지만 평생을 외교관으로 살았고, 그 덕에 신라는 당나라와의 미묘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태종 무열왕은 외교적 통찰력으로 신라를 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외세 의존이라는 위험을 떠안았습니다. 저는 경주에서 돌아오며 계속 생각했습니다. 만약 다른 외교 노선을 택했다면 삼국의 판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무열왕의 선택은 통일의 문을 열었지만, 그 통일이 모두에게 공정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경주를 방문하신다면 무열왕릉과 김인문 묘를 함께 둘러보시길 권합니다. 그곳에서 승리와 희생, 전략과 대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ykvOfrcvMbk&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