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제국 시기, 한국의 자주를 위해 평생을 바친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 안중근 의사는 그를 "한국인이라면 단 하루도 잊어선 안 될 이름"이라 불렀습니다. 헐버트는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 문화재 지킴이로서 조선을 사랑했고, 그 사랑은 죽음 직전까지 이어졌습니다. 그의 삶은 타국인의 연대가 어디까지 가능한지, 그리고 헌신이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한글의 가치를 발견한 학자, 호머 헐버트
호머 헐버트는 1863년 미국 버몬트 주 명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캘빈 버틀러 헐버트는 미들버리 칼리지 총장이었고, 어머니 메리 헐버트는 다트머스 대학 설립자의 증손녀였습니다. 신학 대학 재학 중이던 1886년, 23세의 헐버트는 선교사로서 조선에 왔습니다. 당시 조선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였던 육영공원에서 영어 교사로 부임한 그는 조선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고생을 각오하고 이 땅을 밟았습니다. 헐버트가 조선에 온 지 나흘 만에 그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나흘 만에 한글을 깨쳤고, 이 경험은 충격이었습니다. 세종 때 정인지는 "똑똑한 자라면 아침나절이면 익힐 수 있는 글자이고, 어리숙한 자라도 열흘이면 능히 익힐 수 있는 글자"라고 훈민정음을 평가했습니다. 헐버트는 이렇게 훌륭한 문자를 만들 수 있는 민족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했고, 그때부터 조선을 위해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헐버트는 조선 학생들에게 세계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세계 지리 책이 없었기에, 그는 자신이 가져온 세계 지리 책을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3년 만에 완성한 『사민필지』는 "선비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알아야 되는 내용"이라는 뜻으로, 날씨는 조선과 비교하고 수출액은 원화로 환산하는 등 조선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춘 책이었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마는 사람들이 그 요긴한 줄도 모르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라고 적으며, 조선인들이 한글을 업신여기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헐버트는 한글에 대해 세 가지에 놀랐다고 합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문자가 있다는 것, 이렇게 쉬운 문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뛰어난 문자를 사람들이 업신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896년 『조선 소식지』에 띄어쓰기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장비가 말을 타고"라는 문장이 띄어쓰기를 잘못하면 "장비 가마를 타고"로 읽힐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후 독립신문에는 띄어쓰기가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헐버트는 1892년과 1896년 『조선 소식지』에 "한글은 그 어떤 문자보다도 간단하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발명되었으며, 현존하는 문자 중에서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이해하기 쉬운, 가장 완벽한 문자"라고 극찬했습니다. 1903년 스미스소니언 협회 보고서에는 "영어보다 한국어가 훨씬 우수하다"라고 주장하며, "많은 절로 구성된 한국어는 끝에 오는 동사에서 문장의 절정에 이르며, 영어 문장의 용두사미 현상이 한국어에는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어는 대중연설 언어로서 영어보다 우수하다"라고 분석했습니다. 헐버트의 제자였던 주시경 선생은 배재학당에서 그의 가르침을 받았고, 헐버트는 주시경이 언어에 천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며 함께 한글 연구를 했습니다. 주시경 선생은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라고 말하며 한글의 대중화와 맞춤법 연구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헐버트는 "조선이 한글 창제 직후부터 한자를 던지고 한글을 받아들였다면 조선에게는 무한한 축복이었을 텐데"라고 개탄하기도 했습니다.
| 시기 | 저작/활동 | 주요 내용 |
|---|---|---|
| 1889년 | 사민필지 출판 | 세계 지리 책 한글 번역, 띄어쓰기 미적용 |
| 1892년 | 조선 소식지 논문 | 한글의 과학성과 완벽성 극찬 |
| 1896년 | 띄어쓰기 주장 | 의사 전달 정확성 강조, 독립신문 적용 |
| 1903년 | 스미스소니언 보고서 | 한국어가 영어보다 우수하다고 주장 |
이러한 활동은 외국인으로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라는 정체성은 복합적인 질문을 남깁니다. 교육과 계몽 활동이 순수한 연대였는지, 서구 문명과 기독교적 가치의 확산이라는 문화적 영향력 행사와 분리될 수 있는지는 비판적으로 살펴봐야 할 지점입니다.
독립운동가로서의 헐버트, 을사늑약과 헤이그 특사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났습니다.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자객들에게 시해당했고, 고종은 왕비의 죽음을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장례식도 제대로 치를 수 없었습니다. 경복궁은 일본군에 에워싸여 있었고, 고종은 식사와 수면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서양인 선교사들이 고종의 식사를 직접 만들고 방문 앞에서 불침번을 섰습니다. 헐버트도 자진해서 고종의 방문 앞에 불침번을 섰고, 그는 "조선의 조약 상대국들이 이 사건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서양 문명의 한계이자 슬픈 역사"라고 한탄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전, 고종은 헐버트에게 친서를 전달해 미국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하도록 부탁했습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는 거중조정 조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조항은 한국이 다른 나라에 의해 침입을 받거나 불이익을 당할 경우 미국이 중재해 주기로 약속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헐버트의 면담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루스벨트는 친일 인사였고, "대한제국은 어차피 망할 나라다. 한국의 운명을 일본에 맡겨서 오히려 러시아를 견제하는 편이 낫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며칠 전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상태였습니다. 이 밀약은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을 일본이 눈감아주고,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을 미국이 눈감아 주기로 약속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루스벨트는 시간을 끌며 헐버트를 만나주지 않았고,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헐버트는 "미국은 한국이 어려움에 닥쳤을 때 제일 먼저 한국을 저버렸다. 그것도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인사말도 없이"라고 비판하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데에는 미국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고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후,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명의 특사는 각각 다른 곳에서 출발해 헤이그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헐버트만을 예의 주시하며 감시했습니다. 일본은 "미국인 헐버트는 시종 우리의 대한 정책을 방해하는 행동을 한 자이며, 그가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를 이용하여 일한 관계를 방해하고 한국을 위해서 무언가 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세 명의 특사는 무사히 헤이그에 도착할 수 있었고, 헐버트는 제4의 특사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헐버트는 고종으로부터 특사 위임장을 받았고, 러시아, 독일, 스위스, 프랑스 등 9개 나라에 고종의 친서를 전달했습니다. 또한 영국의 유명한 언론인 윌리엄 스테드를 만나 조선의 사정을 전달했습니다. 윌리엄 스테드는 헤이그 특사들로부터 탄원서를 받아 그 전문을 만국평화회의보에 실었고, 이위종과 인터뷰를 해 기사로 실었습니다. 이위종은 "대포가 유일한 법이고, 강대국들은 어떤 이유로도 처벌될 수 없다고요. 왜 대한제국이 희생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극동의 스위스가 될 수 있었지만 전쟁을 원치 않았습니다"라고 호소했습니다. 윌리엄 스테드의 주선으로 헤이그 특사들은 150여 개국에서 온 기자들 앞에서 연설했고, 많은 기자들은 대한제국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국제사회는 힘의 논리로 움직이고 있었고,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은 강제 퇴위를 당했습니다. 1909년 고종은 상해 덕화은행에 예치해 둔 비자금을 찾아 의병들에게 전달해 달라고 헐버트에게 부탁했으나, 일본이 위임장을 위조해 예금을 모두 인출한 후였습니다.
| 연도 | 사건 | 헐버트의 역할 |
|---|---|---|
| 1895년 | 을미사변 | 고종 방문 앞 불침번, 서양 열강 비판 |
| 1905년 | 을사늑약 직전 | 고종 친서 전달, 미국 대통령 면담 요청 |
| 1907년 | 헤이그 특사 | 제4의 특사, 9개국 친서 전달, 언론 활동 |
| 1909년 | 비자금 인출 시도 | 상해 덕화은행 방문, 일본의 위조로 실패 |
헐버트의 노력은 진정성이 있었지만, 강대국 정치의 벽을 넘기에는 구조적 한계가 컸습니다. 국제 여론을 통해 식민 지배를 견제하려 했지만, 제국주의 질서 속에서 이 전략이 얼마나 현실적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활동은 외부의 도움과 자주성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문화재 지킴이 헐버트,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역사 편찬
헐버트는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데도 헌신했습니다.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대리석 탑으로, 무게만 10톤이 넘고 높이가 13.5미터에 달하며 구석구석 화려한 조각이 새겨져 있습니다. 1907년 일본 대신 다나카는 이 탑을 140조각으로 나누어 트럭, 기차, 배에 실어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헐버트는 현장을 쫓아가 "탑을 끌어 간 수레의 바퀴 자국이 남아 있었다"라고 증언하며, 일본의 야만적인 문화재 약탈 행위를 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헐버트와 영국인 베델은 적극적으로 경천사 10층 석탑을 되찾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베델이 만든 『대한매일신보』에는 "이 약탈 사건이 미국 등 해외에서도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는 기사와 "다나카는 우리 국민을 만만히 봤다. 조선 인민은 그 만행과 모욕에 결연히 항거할 것이다"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헐버트는 일본 영자 신문인 Japan Chronicle에 "한국에서의 일본의 만행"이라는 제목으로 연속 기사를 실었고, 헤이그에서도 이 내용을 알렸습니다. 결국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지에도 기사가 실렸습니다. "임진왜란 때 두 탑에 눈독을 들인 자가 가토 기요마사였다. 400년 뒤 다나카는 서울의 원각사 탑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차마 가져가지 못하고 개성에 있던 경천사 탑만 강탈해 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일본은 난처해졌고, 일본 내 여론도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나카는 11년 만에 경천사 10층 석탑을 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탑은 두 번이나 동해 바다를 건너며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당시 우리는 보수할 실력이 없어 방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60년대 경천사 10층 석탑을 보수해 경복궁 안에 세웠으나, 대리석은 산성비에 취약하고 새들의 배설물로 훼손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에 10년에 걸쳐 보수 복원을 하고,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때 실내로 옮겼습니다. 덕분에 지금은 1층, 2층, 3층 구석구석의 화려한 조각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기단부에는 서유기 이야기인 손오공과 삼장법사의 조각이 있는데, 이는 중국 원나라 말기에 쓰인 서유기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유기 기록입니다. 헐버트는 역사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제자 오성근과 함께 『대한 역사』를 편찬했습니다. 1908년 상권이 먼저 나왔으나 일본의 검열에 걸려 1909년 금서로 지정되었습니다. "일본 경찰이 염장도 없이 들어와서 책을 몰수해 불태웠다"라고 헐버트는 비분강개했습니다. 이후 그는 『한국사』를 영문으로 편찬했습니다. 이 책에는 세종대왕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문자의 단순성과 소리를 표현하는 방식의 일관성에서 한국의 소리글자와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세종은 어려움을 마다지 않고 한자를 변형하는 방식이 아닌 전혀 새로운 문자인 소리글자를 창제하여 한자로 인한 백성의 고충을 덜어준 첫 번째 인물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헐버트는 『대한제국 멸망사』도 편찬했습니다. 이 책에는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담겨 있습니다. 민영환은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나는 죽음으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2천만 동포에 사죄하노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습니다. 헐버트는 "그의 애국충정의 정신이 한국인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민영환이 자결한 방에는 피가 흥건했고, 부인은 그 방을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약 1년 후 방문을 열자 피가 흘렀던 자리에서 네 곳에 아홉 가지로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대나무 잎은 모두 마흔다섯 장이었습니다. 마흔다섯은 민영환이 자결할 때 나이였고, 이 혈죽은 지금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헐버트는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는 아리랑 노래에 서양식 악보를 붙여 서양에 전했고, "나는 1,800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의 그러한 행동은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삶은 단순한 선교 활동을 넘어 조선을 주권을 가진 국가로 보려 했고, 문화와 역사를 존중했습니다.
| 분야 | 주요 활동 | 의미 |
|---|---|---|
| 문화재 보호 | 경천사지 10층 석탑 탈환 운동 | 일본의 문화재 약탈 고발, 국제 여론 조성 |
| 역사 편찬 | 대한 역사, 한국사, 대한제국 멸망사 | 한국 역사의 정당성과 가치 해외 알림 |
| 문화 전파 | 아리랑 서양식 악보 작성 | 한국 문화의 세계화 기여 |
하지만 선교사라는 정체성은 여전히 질문을 남깁니다. 그의 활동이 순수한 우정이었는지, 문명적 사명의 연장이었는지는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국제 여론이 더 강하게 움직였다면 대한제국의 운명은 달라졌을까요? 타자의 연대가 어디까지 가능한지, 외부의 도움과 자주성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지를 그의 삶은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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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강혜영의 역사이야기 유튜브 : https://www.youtube.com/watch?v=ut3XrzMlcWk&list=PLy90vVBmFvMYxdiZLVQogvcekqZSUFqDL&index=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