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책에서 읽은 독립군 이야기와 실제 전투 현장은 얼마나 다를까요. 저는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공부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이끈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비결이 단순히 '용맹함'만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요. 자료를 파고들수록 그 안에는 치밀한 전술과 지형 활용, 그리고 현지 주민들의 헌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무장 투쟁 노선이 직면한 한계도 함께 보였습니다.
봉오동 전투의 승리 요인
1920년 6월 7일 새벽, 봉오동 골짜기에서 벌어진 전투는 한국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첫 번째 본격적인 승리였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월강추격대(越江追擊隊)'라는 개념입니다. 월강추격대란 국경선인 두만강을 넘어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조직된 일본군 특수부대를 의미합니다(출처: 국가보훈부). 일본이 중국과의 외교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월강추격대를 투입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독립군의 위협 수준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전투를 분석하면서 홍범도 장군의 배경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포수 출신이었습니다. 포수란 조선시대부터 산속에서 맹수를 사냥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직업 사냥꾼을 뜻합니다. 당시 포수들이 사용한 화승총은 심지에 불을 붙인 뒤 화약이 점화될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구조였기 때문에, 호랑이를 상대로 단 한 발의 기회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단련된 사격 실력은 일본군에게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일본군 보고서에는 "독립군이 700~800m 거리에서도 정확한 사격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는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그만큼 독립군의 사격 능력이 뛰어났다는 반증입니다. 홍범도 장군은 병의 주둥이로 총알을 넣어 바닥을 뚫는 사격 실력으로 유명했다고 전해집니다.
봉오동 전투의 승리 요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간도국민회군, 신민단 등 여러 독립군 조직이 '대한북로독군부'라는 연합군을 구성하여 전력을 집중했습니다
- 봉오동의 험준한 지형을 활용해 일본군을 깊숙이 유인한 뒤 포위 사격을 가하는 매복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 간도 지역 한인들이 주먹밥과 정보를 제공하며 후방을 지원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지점을 발견했습니다. 독립군이 체코군단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체코군단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러시아 땅에서 싸우다가,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귀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기를 판매했습니다. 같은 독립을 위해 싸우는 처지였기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거래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 무기를 독립군 거점까지 운반한 것은 간도 지역 수천 명의 민간인이었습니다. 밤에 산을 타고 짚신 신은 채로 무기를 날랐다는 기록을 보면서, 독립운동이 단순히 전투원만의 투쟁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출처: 독립기념관).
청산리 전투와 무장 노선의 한계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은 '간도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지칭하던 용어로, '불온한 조선인'이라는 뜻입니다. 일본은 훈춘 지역의 일본 영사관을 마적단에게 공격하도록 사주한 뒤, 이를 명분으로 25,000명의 대규모 토벌대를 파견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무장 투쟁의 구조적 한계를 느꼈습니다.
독립군은 백두산 인근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군의 추격을 받으며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청산리 일대에서 열 차례의 전투를 벌였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백운평 전투에서 거짓 정보를 흘리고 말똥을 일부러 말려 놓아 일본군을 방심하게 만든 뒤 매복 공격으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완루구 전투에서 일본군의 포위망을 돌파한 뒤, 그 사실을 모르는 일본군끼리 서로 오인 사격을 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청산리 전투는 분명 승리였지만, 저는 이 전투의 성격이 봉오동과는 다르다고 봅니다. 봉오동은 독립군이 주도적으로 전략을 짜서 일본군을 유인한 공세적 승리였습니다. 반면 청산리는 일본의 대규모 토벌에 쫓기면서 후퇴하는 과정에서 거둔 방어적 승리였습니다. 물론 열세 속에서도 승리를 거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지만, 전략적 여건은 이미 불리해지고 있었습니다.
청산리 전투 이후 독립군은 더 이상 만주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게 됩니다. 홍범도 장군 역시 이후 소련 지역으로 이주하여 고려인 사회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만약 국제적 연대와 안정적인 후방 기지가 확보되었다면, 무장 투쟁의 결과는 달라졌을까요.
홍범도 장군은 전투에서는 뛰어난 전술가였지만, 장기적인 독립 전략 수립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군사력의 절대적인 격차, 보급과 후원 체계의 부족, 중국·러시아와의 외교적 제약 등 무장 노선이 직면한 구조적 문제는 개인의 용맹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은 다양한 노선—외교, 문화, 무장—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했고, 어느 하나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삶은 저항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전략·조직·외교의 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의 승리를 기리면서도, 그 이후의 과제—즉 어떻게 승리를 지속 가능한 독립으로 연결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영웅 개인의 서사가 아니라, 그 시대가 품은 복합적 맥락 속에서 읽혀야 합니다. 홍범도 장군이 남긴 유산은 용맹함뿐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풀지 못한 질문들이기도 합니다.
2021년8월 홍범도장군의 유해를 이념적 논란과 북한의 주장속에 카자흐스탄에서 국내로 결국 송환한 것과, 2023년 여름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되어 있던 홍범도장군의 흉상 이전 계획이 최종적으로 철회되어 육군사관학교 충무관 앞 현재 위치에 영구 존치되어 보존하는것은 개인적으로 아주 잘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독립운동가의 나라를 위한 헌신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나무위키 에서 홍범도 장군에 대한 더 자세한 생애 활동과 사후 이력에 대해서 알아보실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ygLbtRK_odE&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