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렸을 적 동네 골목에서 놀던 중, 갑자기 친구 누나가 학교에서 돌아와 우리를 방 안으로 불러들이며 "지금 밖에 나가면 군인들이 잡아간다"라고 겁을 주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너무 어려서 무슨 일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공포스러운 분위기만큼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훗날 대학생이 되고 군 복무를 마친 뒤에야, 그때 누나가 말했던 사건이 바로 민주항쟁 당시 시위 시민들을 계엄군이 무력으로 진압하던 시기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분들의 희생 덕분에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저는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작은 영웅들의 죽음, 그날의 기록
1980년 5월 18일, 전남대학교에 공수부대가 배치되면서 광주는 국가 폭력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학생과 시민을 향해 곤봉과 총검을 휘둘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수부대'란 특수 훈련을 받은 공수작전 전문 부대로, 본래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임무를 맡았던 군 조직을 의미합니다. 그런 부대가 자국민을 향해 무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은, 당시 상황이 얼마나 비정상적이었는지 보여줍니다.
5월 21일, 시위대에 합류한 광주 시민 수는 20만 명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정치적 요구를 외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생명권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출처: 5·18 민주화운동기록관). 제가 자료를 찾아보며 가장 충격을 받았던 건, 어린 학생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희생되었다는 점입니다. 광주교육청 기록에 따르면, 당시 희생된 학생만 16개 학교 18명에 이릅니다. 이 중에는 중학교 1학년 방광범 학생처럼, 단지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러 갔다가 머리에 총을 맞고 숨진 경우도 있습니다.
당시 택시와 버스 기사들이 시위대 선두에 섰던 이유도 명확합니다. 부상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던 택시 기사가 공수대원에게 차를 멈추라는 명령을 받았고, 간곡히 사정했음에도 유리창이 부서지고 기사는 대검에 찔려 숨졌습니다. 이 사건이 택시·버스 업계 전체를 시위 대열로 이끈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생명을 구하려던 평범한 사람이 오히려 살해당한 현실 앞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절망했을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주요 희생 학생들의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 문재학 학생(광주상고 1학년): 전남도청에서 시신 수습과 부상자 치료를 돕다가 5월 27일 계엄군 진압 당시 사망
- 박금희 학생(광주여고 3학년): 헌혈 후 병원을 나오다 허리와 복부 관통상으로 사망
- 박현숙 학생(광주여상 3학년): 관 구하러 가던 버스에서 총격으로 사망, 시신에는 총상과 함께 자상까지 발견됨
- 권호영 학생(고등학교 3학년): 22년 만에 무명 열사로 묻혀 있던 시신이 DNA 조사로 신원 확인됨
특히 김부열 학생의 죽음은 참혹함 그 자체였습니다. 조대부고 3학년이던 그는 5월 21일 집을 나선 뒤 20여 일이 지나서야 주남 마을 뒷산에서 발견되었는데, 목이 잘려 나가고 가슴과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습니다. 유족들은 어머니에게 시신을 보여줄 수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칠 남매를 키우던 강인했던 어머니는 이 사건 이후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없었고, 자식의 이름을 되찾아 주는 것만이 살아갈 이유라며 상경 투쟁에 나섰습니다.
시민 희생이 남긴 것, 민주화의 씨앗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5월 27일 전남도청 진압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공식 발표된 사망자는 165명이지만, 실종자와 은폐된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서 '은폐된 희생자'란 공식 기록에 남지 않았거나 신원 확인이 늦어진 사망자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국가가 의도적으로 숨기거나 기록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당시 광주는 사실상 '내륙의 섬'이었습니다. 모든 통신과 교통이 차단되어, 광주 시민들이 겪는 비극이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겪었던 그 공포스러운 분위기도 바로 이런 정보 통제 때문이었을 겁니다. 광주 외 지역 사람들은 그저 "뭔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구체적 사실은 전혀 몰랐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광주의 진실이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외신 기자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다섯 살 아이가 아버지 조계천(당시 33세)의 영정을 든 사진입니다. 아버지는 계엄군의 총에 머리부터 목, 가슴으로 이어지는 관통상을 입고 사망했는데, 이는 옥상 같은 높은 곳에서 조준 사격을 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출처: 5·18 기념재단). 이 사진은 전 세계에 5·18의 아픔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고, 이후 1980년대 시위와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6월 항쟁 역시 작은 영웅들의 희생 위에 세워졌습니다. 1987년 1월 박종철 학생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단이 되었고, 6월 9일 연세대에서 최루탄에 맞아 의식을 잃은 이한열 학생의 사진이 전국을 뒤흔들었습니다. 저는 당시 사진을 보며, 최루탄이 날아오는 순간이 포착될 정도로 진압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6월 18일에는 전국 26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 시위가 벌어졌고, 특히 부산 서면에서 좌천동 고가도로까지 행진하던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태춘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추락해 6일 후 숨졌습니다. 이태춘 열사의 어머니는 훗날 인터뷰에서 "너 민주화 운동 잘했다. 우리나라 네가 죽고 나서 다 잘되고 잘 산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한 문장에 담긴 슬픔과 자부심을, 저는 쉽게 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이한열 학생은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7월 9일 숨을 거뒀고, 그의 장례 행렬에는 수많은 시민이 함께했습니다. 그날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모습은, 6월 항쟁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염원이었는지 증명합니다.
5·18과 6월 항쟁을 거치며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손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그 제도가 오늘날 우리 삶 속에서 얼마나 살아 숨 쉬고 있는지, 저는 가끔 의문이 듭니다. 희생자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단순히 투표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유였습니다. 우리는 그 유산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단순히 추모에 그치지 않고 권력과 시민의 관계를 어떻게 재설계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도 어린 시절 그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떠올리며, 그분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깨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NhOofKSlf1U&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