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는 한 번의 승리로 완성되는 걸까요, 아니면 끊임없는 감시와 실천으로 유지되는 걸까요? 1987년 6월 항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분수령으로 평가받지만, 저는 이 사건을 볼 때마다 복잡한 감정이 듭니다.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시민의 분노를 일깨웠고, 거리의 외침은 직선제 개헌이라는 제도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권력기관의 문화는 정말 달라졌을까요? 개인의 희생이 집단의 각성으로 확장된 과정은 인간 존엄과 진실의 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깊은 공감을 주지만, 동시에 우리가 놓친 것은 없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은폐와 폭로, 진실을 향한 기록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학생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하루 만에 고문으로 사망했습니다. 치안본부는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황당한 발표로 사건을 덮으려 했죠. 하지만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가 대검찰청에서 입수한 정보를 화장실에서 급히 작성해 기사로 내보내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언론의 보도 지침(reporting guideline)입니다. 당시 정부는 각 언론사에 보도 지침을 내려 통제했는데, 이는 정권이 언론을 직접 통제하여 특정 내용을 보도하거나 보도하지 못하게 지시하는 검열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신성호 기자의 기사는 이러한 통제망을 뚫고 나온 첫 신호탄이었던 셈입니다.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는 중앙대병원 오연상 의사를 화장실에서 기다리며 결정적 증언을 받아냈습니다. 오연상 의사는 "조사실에 욕조가 있었고, 폐에서 수포음이 났으며, 바닥에는 물이 흥건했다"라고 증언했습니다. 여기서 수포음(rales)이란 폐에 물이나 액체가 차서 호흡할 때 들리는 비정상적인 소리로, 물고문이나 익사를 의심할 수 있는 의학적 징후입니다. 오연상 의사의 증언은 단순한 쇼크사가 아니라 물고문 도중 질식사였음을 시사했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 박사는 부검 결과 박종철의 한쪽 폐에서 물과 플랑크톤을 발견했습니다. 치안본부는 부검 소견서에 "심장마비"라는 네 글자만 적으라고 강요했지만, 황적준 박사는 "제 양심이자 직업윤리"라며 거부했습니다. 부검의(forensic pathologist)로서 사인을 왜곡하면 직업을 그만둬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지킨 것입니다. 그의 소신 덕분에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지만, 그는 국과수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저는 이 대목에서 의문이 듭니다. 진실을 밝힌 사람들이 왜 대가를 치러야 했을까요? 오연상 의사는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황적준 박사는 직장을 잃었습니다. 신성호 기자와 윤상삼 기자는 목숨을 걸고 취재했지만, 이들의 용기가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제도가 바뀌어도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도소 안에서는 '비둘기 작전'이라는 비밀 활동이 진행되었습니다. 해직 기자 이부영은 수감 중 박종철 사건에 연루된 두 명의 경찰을 보며 의심을 품었습니다. 한 명은 찬송가만 부르고, 다른 한 명은 계속 울기만 했죠. 이부영은 교도관 한재동을 통해 "다른 경찰들도 있다"는 쪽지를 바깥에 전달했고, 이 정보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으로 이어졌습니다.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김승훈 신부가 이 사실을 폭로하면서 또 한 번 시민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진실을 알리기 위한 이들의 연대는 권력의 은폐 시도를 무너뜨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묻고 싶습니다. 왜 진실이 이토록 우회적인 경로를 거쳐야 했을까요? 공식 채널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검찰, 경찰, 언론이 모두 권력에 포섭되어 있었던 시대, 진실은 화장실에서 쓴 메모와 교도소의 쪽지로만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거리의 함성과 미완의 과제
박종철의 죽음에 이어 1987년 6월 9일, 연세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에 빠졌습니다. 로이터 통신의 정태원 기자가 찍은 사진—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을 동료가 부축하는 장면—은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이 한 장의 사진이 6월 10일 국민대회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6월 항쟁은 직접선거제(direct election system)를 요구하는 시민의 목소리였습니다. 직접선거제란 국민이 직접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간접선거제(체육관 선거)와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조치로 기존 헌법을 고수하려 했지만, 전국적인 시위에 밀려 6월 29일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선언을 발표했습니다(출처: 국가기록원).
많은 분들은 6월 항쟁을 민주화의 승리로 기억합니다. 저 역시 그 의미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이후를 돌아보면, 제도는 바뀌었지만 권력기관의 문화와 관행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의문입니다. 직선제 개헌 이후에도 정보기관의 불법 사찰, 경찰의 과잉 진압, 검찰의 정치 개입은 계속되었습니다. 6월 항쟁이 열어놓은 문을 우리가 충분히 활용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또한 박종철과 이한열의 희생이 상징으로만 소비되지 않았는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매년 추모식은 열리지만, 정작 오늘날 권력 감시와 인권 보장은 얼마나 강화되었을까요? 국가인권위원회는 존재하지만, 고문방지협약(Convention Against Torture) 이행 수준은 국제사회에서 여전히 지적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문방지협약이란 유엔이 채택한 국제 조약으로, 고문과 비인도적 처우를 금지하고 국가가 이를 예방·처벌할 의무를 명시한 문서입니다.
제가 특히 주목하는 지점은 책임의 사슬입니다. 박종철을 고문한 경찰 두 명만 처벌받았지만, 고문을 지시하거나 묵인한 상급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조직적 고문이었다면 시스템 차원의 책임 규명이 필요했지만, 개인 몇 명의 일탈로 처리되었습니다. 이런 식의 책임 회피는 조직 문화를 바꾸지 못하게 만듭니다.
6월항쟁 이후의 정치 타협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직선제 개헌은 이루어졌지만, 여야 간 타협 과정에서 과거 청산은 뒷전으로 밀렸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 규명도, 독재 시기 인권 침해에 대한 체계적 조사도 한참 뒤에야 이루어졌습니다. 민주주의의 질을 높이려면 제도 변화와 함께 과거에 대한 정직한 평가가 병행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과정을 충분히 거쳤을까요?
다음 세대에게 6월 항쟁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도 고민입니다. 단순히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한 승리"로만 기억하면, 복잡한 역사적 맥락과 미완의 과제가 사라집니다. 박종철의 죽음이 왜 일어났는지, 그 이후 우리 사회가 무엇을 바꿨고 무엇을 바꾸지 못했는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과제가 남아 있는지 함께 질문해야 합니다.
저는 6월항쟁을 미완의 출발로 봅니다. 직선제 개헌은 중요한 이정표였지만, 민주주의는 한 번의 항쟁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일상 속 권력 감시, 투명한 공공기관 운영, 인권 침해에 대한 신속한 대응, 과거 청산과 재발 방지—이 모든 것이 지속적으로 실천되어야 민주주의는 유지됩니다. 박종철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우리가 권력을 어떻게 감시하고 인권을 어떻게 보장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6월 항쟁은 승리였을까, 미완의 출발이었을까. 저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둡니다. 우리가 쟁취한 직선제는 도구일 뿐, 그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민주주의는 한 번의 항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 실천으로 유지되는 것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됩니다. 박종철과 이한열이 남긴 질문—"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몫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Nvy2ffhfWXg&list=PLny0hGEMqxdde8RpM-WnFUxvNPEEDyvsB&index=110